12화

악마의 사랑

by 제나랑


울리는 해주의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 [이 창혁]


잊을만하면 전화 오는 이 남자는 해주가 30살 때부터 4년 동안 사귄 전남친이다.

해주보다 4살 어린 연하남이고 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은 유명 배우이며,

집 인테리어 공사로 3개월간 해주의 호텔에서 투숙하면서 처음 만났다.

출근하던 해주를 매일 아침 조깅하고 오면서 마주치다가 창혁이 먼저 고백했고 사귀게 되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살갑지 않은 해주에게도

창혁이 바쁠 때는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면서 데이트하고 해주도 살면서 양부모님을 제외하고 인간 어른에게 마음을 연 것은 처음이었으며,

이별 사유라면 비혼주의인 해주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 얘기를 자주 했다는 점이다.

또한, 해주가 비혼에 대해 충분히 의견을 표출하고 설명을 했으나 해주를 설득시킬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계속해서 해주를 괴롭힌 점이다.


해주도 이렇게 결혼을 원하는 남자인데 비혼주의인 데다, 악마인 내가 괜히 멀쩡한 인간 남자의 인생을 낭비시키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에 이별을 고했고

몇 번이고 매달리는 창혁을 냉정하게 밀어냈다.

이후 창혁은 영장이 나와서 군대를 가게 되었고 군복무 기간 중에 창혁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임종 직전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해주라서

창혁보다도 먼저 알게 됐고 창혁이 나올 때까지 해주가 대신 상주 노릇과 장례식 준비를 도맡아 했다.

그 이후로 미련인지, 고마움인지, 착각인지 모를 이유로 계속해서 연락해 오는 창혁


해주는 핸드폰만 바라볼 뿐 받지 않고 끊길 때까지 미동 없이 가만히 있었고 계속 울리던 해주의 핸드폰은 한참을 울린 후에야 끊겼다.

핸드폰 화면에는 부재중 1통이 찍힌다.

이어서 그에게서 장문의 문자가 온다.


-누나, 나 창혁이. 전화 안 받네? 바빠? 그치..대표님이라 엄청 바쁘겠지. 귀찮게 했으면 미안해.

근데 진짜 우리는 친구처럼 지낼 수는 없는 거야? 분명히 누나는 헤어지고 나면 친구가 어딨냐 이러겠지만

친구는 아니더라도 친구'처럼'은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그냥 안부 주고받고, 서로 기쁜 일, 슬픈 일 공유하고,

서로 축하해 주고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해 주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혹시 만나는 사람 있어서 그래? 그럼 대답 좀 해주라...


(하...창혁아, 난 네가 차라리 나쁜 새끼였음 좋겠다.

그럼 다른 인간들처럼 처리하기가 쉬울 텐데...

내가 누구보다도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네가 나한테 이러는 이유도 조금은 이해가 가고,

그렇다고 내가 악마라고 말할 수도 없는데...

내가 너에게 뭐라고 대답해 줄 수 있겠니...)


20대 때는 상대가 결혼 얘기를 꺼내는 경우도 적고, 만나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쉬웠는데 서른 넘어서 창혁처럼 좋은 인간을 만날 확률도 높아지지만

결혼 얘기를 안 할 수 없는 나이인데 비혼이고 뭐고, 악마가 인간이랑 무슨 사랑? 무슨 결혼? 만나는 것도 어렵지만 헤어지는 건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이제는 시작도 안 하게 된다.

어차피 10년 뒤면 다른 신분으로 살게 될텐데...늙지 않고 죽지 않는 대신 44년을 주기로 매번 신분을 바꿔 살아가야 한다는데...

괜히 복잡한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다.


이런 해주가 욱에게 기대하는 건 무엇일까?

단지 이 역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혹시나 이 역과 연관이 있을까 해서?

하지만 확실한 건 과거의 기억이 없는 욱이 해주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본인도 모른다는 것이다.


해주는 내일부터는 욱이 시나리오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기는 바라며 잠자리에 든다.


[악마의 악몽 속]


온갖 괴물들과 악귀들이 득실 거리고 전부 해치워가며 그 공간을 지나자 문이 나오고 그 문을 열자

어두운 통로가 나오고 또 문이 나오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나서야 차원의 경계선과 똑같이 생긴 문이 나오는데

그 문을 열자 매번 여기서 해주는 이 악몽에서 깨곤 한다.


"하...도대체 그 문 뒤에 뭐가 있길래...이렇게 악몽까지 꾸게 하면서 나를 괴롭히는 건데...왜...싸운 건 악몽 속인데 왜 항상 난 땀에 젖어있냐고...아 찝찝해..."


자다가 악몽 때문에 깬 해주는 찝찝함에 시간 관계없이 샤워를 하고 다시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눕는다.

이런 이유로 해주는 20살 때 이후로 악몽이 시작되면서 단 하루도 3시간 넘게 잔 적이 없고 깊은 잠에 들기가 힘들다.

심할 때는 약도 먹어보지만 소용이 없는 듯하다.

잠들기 전에는 악몽 꿀까 봐 쉽게 잠에 들지 못하고, 잠들고 나면 악몽을 꾸고 그 악몽 때문에 깨고,

땀 때문에 샤워하고 다시 잠에 드려고 누워도 한 번 깨면 다시 잠에 들기는 더욱 힘들다.

이런 수면 패턴이 아무리 악마라도 좋을 수는 없다.


"하...진짜 누가 나 악몽 안 꾸고 숙면 취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 나타나면 내 돈이고, 영혼이고, 다 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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