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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로션을 얼굴에 바르다

새로운 삶은 이사 가기 3주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이제 깨달았다

by 안개꽃

남편은 진작에 얼굴만 차별하지 말고 그냥 바디로션 하나로 얼굴 포함하여 온 스킨에 바르면 어떻겠냐고 했었다. 예전 대학생 때 시작한 화장품 가게 알바로 인해 얼굴에 굉장히 다양한 스텝으로 각종 로션을 바를 수 있는 걸 배웠다.

그때부터 난 한국 기초 제품으로 스킨, 로션, 에센스 또는 크림 등 3가지는 꼭 써왔고, 내 소중한 얼굴에 10불짜리 바디로션을 바르라는 남편을 어처구니없어했다. 뭐라 대꾸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의 의견은 이거다. '다 똑같은 피부인데 왜 얼굴이라고 차별해야 하는가. 그리고 외모에 관심을 줄이고, 더 이뻐 보이고 싶은 욕구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자'이다.

그런데 3주 전 미리 이삿짐을 보낼 때 분명히 샘플 사이즈 로션을 빼두었는데 트럭이 떠나고 보니 화장실엔 바디로션만 남아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난 네가 의심스럽다 했더니 자긴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땐다.


그래서 지난 2주간 난 바디로션을 얼굴에 바르고 있다. 후기로 말할 거 같으면.. 뭐 아주 못 할 일은 아니라는 것 정도이다. 물론 내 화장품이 무척이나 그립지만, 피부 상태가 딱히 더 나빠진 것 같진 않다.

절대 못할 것 같던 일들을 하고 있는 중이다. 비누 하나로 머리도 감고, 바디워시도 한다. 짐을 다 보냈기 때문에 나랑 남편은 티셔츠 3-4장, 츄리닝 바지 두 개, 회사 바지 한 개, 등으로 버티고 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야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우린 떠나기 3주 전부터 이미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였다.


해보니 또 할만하고 시간은 잘도 흘러서 살아진다. 애들 장난감을 다 보내고 나니, 애들 물건으로 집을 어지럽히는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집안도 아주 깨끗하다.


밥솥도 없으니 냄비밥을 해 먹었다. 이웃이 전기압력솥을 빌려줘서 다행히 좀 편해졌다.

냄비밥은 절대 할 일이 없을 거 같았는데 또 해보게 됐다. 그곳에 가서는 또 어떤 새로운 일들을 마주하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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