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을 기약하며
밤새 뒤척거려서 온몸이 피로로 가득한 채 하루를 시작했다.
나는 사실 예전에는 피곤하면 어디에든 머리만 대면 잠을 잘 자는 스타일인데,
혼자 낯선 환경에서 잠을 자서 그런 것인지,
호텔 방에 있는 온도계에서 나오는 작은 불빛 하나가 거슬리게 된 후로 잠을 자지 못했다.
'예민함'과 '무던함'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나는 '무던함'이었는데,
어쩌다'예민함'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
어릴 때는 성실하게만 하면 결과가 늘 따라왔었다.
공부라는 게 사실, 노력하면 어느 정도 성적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니까.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달랐다.
내가 성실하게 노력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공부머리와 일머리는 달라"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성실함보다는 민첩함이 중요하다는 숨은 뜻이 있었고,
나의 성실함이 빛을 낼 때도 물론 있었지만 손해를 보는 경우 또한 허다했다.
"뭘 그렇게 까지 해? 라는 말을 들을 때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것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답답했던 것 같다.
그리고 늘 기저에 "잘해야 해."가 깔려있던 나는 뭐든 잘하고 싶은 욕구가 컸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에게 이전에 없던 예민함을 조금씩 가져다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잠을 못 잤다는 이야기 하나로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다니.
둘째 날은 영도로 떠났다.
사실 영도해녀촌에 가고 싶었지만,
나의 컨디션이 영 별로라 흰여울문화마을에 가서 힐링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분명 힐링을 하기로 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흰여울문화마을 끝에서 끝을 찍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흰여울해안터널에서 사진도 찍고 싶어서 더웠지만 쉬지 않고 걸었다.
홀로 여행한 시기는 5월 말,
사실 여름이 오기 전이었지만 이미 7월을 버금가는 더운 날씨였다.
걷는 내내 온몸에 땀이 쫙 났다.
이전에 회사 다녔을 때 하지 못했던 광합성을 제대로 했다.
흰여울 해안 터널에는 나 말고는 한 커플밖에 없었다.
사진을 부탁드리고 싶어서 일단 나도 사진을 한 장 찍어드렸고,
공손하게 사진을 부탁드렸다.
알고 보니 이분들은 대만분들이었다.
이번에 여행하면서 느낀 건데 부산에 대만사람들이 여행을 참 많이 온다.
나는 반가워서 중국어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여행 온 것이냐, 며칠 째냐, 부산 어떠냐.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기억에 많이 남는다.
외국어를 할 줄 안다는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짧은 대화를 통해 낯선 곳에서 친밀감을 느낀 그들에게도 잠시나마의 편안함을 주었을 것 같다는 느낌.
걷도 또 걷고,
걷다가 너무 더워서 영도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오늘의 나는 특별한 여행에 대한 욕심 없이 '쉼'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심했다.
카페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는 것.
내가 예전부터 하고 싶어 했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심지어 푸른 바다가 보이는 카페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내가 꺼내본 책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라는 책이었다.
사실 한국어 제목은 직관적으로 책 내용이 드러나지 않아서 마음에 안 드는데,
영어로는 <Repacking Your Bags>이다.
저자는 인생이란 끊임없는 가방을 풀고 싸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시기에 따라서 내가 기존에 메던 가방이 지금은 안 맞아질 수 있고,
가방에 넣고 싶은 물건들이 달라질 수도 있고,
끝까지 가방에서 빼지 않고 넣고 싶은 것들이 있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가방을 다시 싸는 시기가 다를 수 있고 여러 번 올 수도 있는데,
나에게는 그게 지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좋은 물음이 되어주었다.
카페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했다.
살면서 모든 것을 짊어갈 수가 없다면,
내가 포기할 것은 무엇이고 내가 반드시 가져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 자리에서 답이 나왔다면 너무 좋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리가 안되었다.
이렇게 빨리 결론이 나온다는 게 더 웃기지만.
이 숙제는 조금 천천히 풀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남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조금 뜬금없지만 나는 먹방에 충실했다.
부산 돼지국밥으로 시작해 밀면과 피자까지.
웬 피자야? 싶겠지만,
이것도 내가 자제했어야 했던 그놈의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이재모피자'라는 부산 피자 맛집을 알게 되어 먹게 되었다.
여행에서 '우연'을 통해 새로움을 발견하고 싶었지만 실패한 나지만,
안전하게 맛이 보장되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 뭐, 결과적으로 맛있었으니까.
그래서 사실 여행 자체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는 곳에 가고,
예쁘다는 카페에 가고,
포토 스팟에서 사진 찍고,
소품샵에 가고(이게 요즘 유행이라고 한다).
틀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쳤지만 틀에서 못 벗어난 나.
여행을 마치면서는 사실 아쉬움이 컸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동안 틀 안에서 안전하게 여행해 온 나인데,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더 이상한 거지 뭐, 하면서.
그렇다고 수확이 아예 없었던 여행은 아니었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바뀌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으니까.
예전에 어딘가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쉼은 곧 깨달음이다."
그렇다, 앞만 보고 달리면 뭐든 놓치지 쉽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빈 틈이 생길 때야 비로소 새로움이 펼쳐진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에서 어쩌면 여행은 필수 같다.
열심히 살다가 또 여행을 가야겠다고 다짐하고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는 그 물음에 답을 만들어나간 자신을 마주하기를 바라며 나 스스로와 다음 여행을 기약한다.
“나의 인생이라는 여행 가방에는 이제 무엇을 덜어내고 넣을까? ”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