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곡리패밀리
엄마는 나의 뮤즈다.
우리 엄마만큼 까맣고 맑은 두눈으로 내 안위를 걱정해주는 사람도 없고,
우리 엄마만큼 개가 먹는 사료를 아까워하는 사람도 없고,
엄마만큼 수박과 족발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엄마만큼 자매를 차별하는 사람도 없다.
엄마만큼 상추를 토끼마냥 아작아작 잘 씹어먹는 노인도 별로 없고.
엄마를 생각하면 많은 곡의 가사와 선율과 시상과 글감이 떠오른다 ㅎㅎ
상추나 야채를 아작아작 씹어먹는 모습이 마치 토끼 같아서 나는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는대신 <최토끼씨> <토끼야>라고 더 자주 부른다. 그럴때마 초롱초롱 빛나는 검은 눈동자로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데 요즘은 우리 최토끼씨 일기장을 훔쳐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엄마의 일기장을 엮어서 책을 내주겠다는 내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가 한장 두장 쓰기 시작한지 1년. 초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엄마는 맞춤법도 틀리고 삐뚤빼뚤한 본인의 글씨체를 꽤 오랫동안 챙피해했지만 나는 우리엄마의 작문실력을 잘 알기에 언제나 용기를 복돋아주고 있다.
우리 엄마의 일기장과,
내가 쓴 시를 엮어 책한권을 내고 싶은데...
관심있는 편집자들이 이글을 보고 꼬옥 연락해준다면좋겠다!!!!!
엄마와 참기름
엄마는 들기름 두병은 큰언니
두병은 미저리
두병은 여우
남은 두병은 뚱아를 줬다.
내겐 참기름을 주었다.
우리 막내는 참기름을 좋아해, 라면서.
엄마는 내가 태어난 시간을 모른다.
요즘은 치매인척 모른다고 하지만,
사실 치매라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몰랐다.
‘개밥 줄 때’ 라고 했다가, 또 ‘신새벽’이라고도 매번 기억이 바뀌어서
어려서부터 토종비결같은 걸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오늘 점심엔 참기름을 넣고 고추장비빔밥을 해먹을 생각이다.
나는 사실 참기름과 들기름의 맛을 구분하지 못한다.
엄마 기억대로, 내가 참기름을 더 좋아하는 거면 좋겠는데
(** 그런데 요즘엔 참기름, 들기름 가격이 얼마 차이 안난다.)
엄마의 약속
엄마와 36살차이.
올해 나는 마흔 하나. 엄마는 77세!
작년에 분명히 10년 뒤엔 돌아갈테니 편히 살으라고 약속해줬는데
본인 맘대로 올해 또 10년을 연장해버렸다.
"그럼 87세가 아니고 97세에 가겠다고?????"
아마도 백년을 채울 모양이다.
건강하다면야.
치매검사
엄마의 반응이나 걸음걸이가 전보다 둔해져서 병원에 갔다.
치매의 진행속도를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가 이어졌다.
“남편 이름 기억나세요?”
“큰딸 이름은요?”
“장에 갔는데 오이 천원, 나물 2,000원 어치 샀어요 모두 얼마를 내야 하죠?”
“오늘은 며칠이에요?”
“우리나라 대통령이름은요?”
엄마는 긴장했다.
다행히 오늘 의사 질문은 모두 통과.
치매가 아니어도 몰랐을 수 있었던 질문들.
엄마에게는 못 배운 컴플렉스가 있다.
그래서 딸 다섯은 대학교까지 졸업시켜야 한다는 사명 같은 게 있었다.
엄마는 일찍이 치매 판정을 받았다.
아직은 초기라 엄마는 우리 모두를 기억하고
다른 개들보다 밥을 더 많이 먹는 탄이와, 먹깨비 석현이, 먹성 좋은 사위 삐용을
정확히 구분해서,
구박한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엄마의 노화로 인해 괴로운 날들이 찾아 오겠지만
미리부터 슬퍼하지는 않겠다.
뇌경색이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었던 엄마와의 추억과, 기도들.
지금 행복할 이유가 더 선명하니까.
Mom, didn’t ask me
엄마는 묻지 않는다.
왜 결혼 안 하는 지, 연애는 하고 있는지.
엄마는 다만 궁금해한다.
짜준 참기름은 다 먹었는지
저녁밥을 너무 잘 먹는 건 아닌지
사료 아까운데 개밥을 또 준건 아닌지
가끔 엄마는 걱정한다.
행여 시집이라도 가서 엄마 자주 못볼세라.
걱정도 풍년이다.
효녀 심청이는 오늘도
혼자 산책을 하고
혼자 먹방을 본다.
엄마의 고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소리
“개 삽니다, 개사요!”
개장수 차가 돌아다닐때마다 엄마는 고민한다.
사료를 먹어제끼는
심바와 탄이와 레오 중에서
적어도 두 놈은 개장수에게 넘겨야한다고
엄마는 늘 주장해왔다.
자기 밥그릇에 오줌싸는 심바가 요즘 제일 위험하다.
레오는 까불어도 귀염성이 있고
탄이는 똥오줌 잘 가린다고 엄마가 이뻐하는데
심바야 제발, 밥그릇에 오줌 좀 싸지마라.
우리 엄마의 pick, 니가 가능성 제일 높단 말이다.
엄마와의 통화
엄마 마른 오징어 사줄까?
아니. 이젠 안 먹으려고 이빨 망가진대.
엄마 고민없어?
응 없어. 요즘엔.
요즘 기도제목은 뭐야?
애들 건강하고 모두 무사한 거.
엄마 요즘 뭐 들어?
미스트롯 보다가 끝났잖아. 송가인 노래 잘~해
엄마 요즘 속상한 거 없어?
그저께 밤에 정인재가 왔어. 돼지국밥인가 먹고 뼈가 남았다고 개들 주러 왔길래
마침 잘됐다, 싶어서 애들 졸업선물로 십만원씩 용돈보냈어
(돈이 없어져서 속상한건가? 형부가 와서 속상한건가? 엄마는 남은 뼈 안줘서 속상한건가 우리 엄마 왜 속상한지는 당췌 모르겠네 ㅎㅎ)
운동은 해?
안해. 마당에서 왔다갔다 하는 정도.
치매는 어떤거 같애?
치매가 어딨어. 얘좀봐. 나 치매 아니야
(세상 단호박!! ㅋㅋㅋ 그래 엄마 치매 아니면 나도 좋지)
엄마 친구는 어때. 어떻게 지내셔?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어. 내가 놀러간다고 했더니 나중에 오라고 하길래 속으로
나도 미투다, 그랬어. 속으로!
엄마, 그럼 잘자.
너도 조심히 다녀.
내가 막내딸을 잘 낳았지
여고동창 투덜이 스머프가 엄마 집에 들러 양말 꾸러미를 한 아름 두고 갔다.
집에 엄마만 있었는데,
선물을 받자마자 친구에게
“내가 우리 막내딸을 잘 낳아놨지”하더란다.
보통은, 고맙다, 고 말할 텐데, 엄마는
본인을 치하했다.
엄마도,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