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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Jun 03. 2020

아빠와 꼬막

도곡리 패밀리



어려서부터 아빠를 따라 논으로 밭으로 종횡무진 헤매고 다녔다. 고사리같은 손으로 농사일을 돕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논두렁에 물을 걷어내거나 밭고랑 사이 사이로 비집고 나온 풀을 제거하는 일은 거뜬히 해냈다. 고되고 외로운 농사일을 매일아침부터 매일저녁, 반복해서, 묵묵히 해야만 하는 아빠에게 나는 고마운 대화 상대이자 친구였고 둘도 없는 동지였다(내 생각엔 그런데, 이미 고인이 된 터라 아빠의견은 확인할 길이 없다;)


아빠에겐 다른 네 명의 딸들이 더 있었지만 다섯명의 딸들 중에서 유독 나를 데리고 다녔다.

(중고등학생인 언니들에 비해 내가 제일 시간이 많아서였을까? 내가 제일 귀여웠나? 하하!)


아빠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동네 사람들과 미꾸라지를 잡아 추어탕을 끓일 계획을 세웠고, 돼지나 소라도 잡는 날은 그야말로 동네 잔치로 떠들썩했다.


집 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통통하게 살이 오를 때쯤엔 또 그렇게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들여 술자리를 벌이곤 했는데,

그런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대성통곡을 해야했다. 희생제물이 모르는 개라면 조금 덜 슬펐을텐데, 그 개는 언제나 내가 애지중지하던 우리집 멍멍이였다  복실이, 부시, 해피 다양한 아이들이 아빠와 동네아저씨 무리에 의해 희생됐다. 아빠는 한사코 ‘나의 귀염둥이’ 멍뭉이는 목끈이 풀려 집을 나갔고, 이건 그개가 아니라고, 나를 달랬다. 하지만 그런 걸 모를 리 없는 나이였다. 그리고 더욱 잔인한 것은 눈물을 훔치면서 나또한 모르는척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는 사실이다 (개를 키우는 입장에서, 비위 상하고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1990년도 초반 시골에서는 놀랄만한 일도, 문화충격적인 일도 아니었다. 지금은 더이상 보신탕을 먹지 않는다. 그것 외에도 먹을게 넘쳐나는 시대니까. 당시 상황과 시대 흐름을 고려하여  글을 읽어주좋겠다).


아빠에 대한 글을 쓰면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바로 저 너머 논이다. 말 그대로 백마골이란 골짜기 너머에 있는 논인데, 아빠는 농부들이 모두 그러하듯 그 논을 목숨처럼 애지중지했다. 그 귀한 논에, 모내기를 하는 날, 그날은 1년에 몇 안되는 우리집에서 귀하고 큰 행사날이었다. 평소에는 구경도 할 수 없는 꼬막을 먹을 수 있는데, 1년에 한번 모내기 하는 봄에나 먹을 수 있는 별미라, 우리 5자매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일꾼들 끼니나 새참에 신경을 많이 쓰고, 손도 빠른데다, 음식솜씨도 좋은 우리 엄마는, 모내기나 추수를 하는 날에는 꼭 삶은 돼지고기 머리(편육)나 꼬막을 정성껏 차려냈다. 성미는 불같아도 밥상 하나는 푸짐하고 정성껏 그야말로 <기똥차게> 준비해주는 손 큰 엄마. 울 엄마 전매특허 요리가 몇개 되는데, 그중 모내기하는 날의 꼬막과 적당히 기름기를 뺀 편육이 단연 기가막히다. 밥과 반찬을 담은 큰 대하를 머리에 이고 가는 엄마를 따라,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아빠와 일꾼들이 있는 논으로 가는 날은, 소풍가는 것처럼 신나고 행복했다.


저너머 논에 모를 심고, 행여 물이 부족할세라 미리미리 물대기를 마치고, 어스름 저녁즈음, 자전거를 타고 백마골을 넘어오는 아빠의 콧노래가 들릴때면 마음이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었다. 물론 어느날은 콧노래 소리 이후, 갖가지 다른 이유로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아빠가 있던 시절의 해질녘 풍경들은 늘 따뜻하게 기억된다. 가만히 평상위에서 누워있다보면 저절로 마당으로 찾아오는 노을. 뻐꾸기와 지빠귀소리. 강아지 짖는 소리. 언니들 학교에서 돌아오는 발걸음. 엄마랑 할머니가 저녁 찬거리 준비하면서 또 티격태격하는 소리.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는 더이상 농사를 짓지 않는다. 당연히 모내기도 하지 않기에, 엄마도 꼬막무침을 만들지 않는다.


이번 주엔 엄마한테, 예전처럼 꼬막무침 좀 해달라고 졸라봐야겠다.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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