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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정 Sep 29. 2021

색채가 가득하게 도시를 걷는 방법

 반복되는 일상은 삶에서 색채를 빼앗는다. 커다란 나무에 셀 수 없이 많은 나뭇잎이 똑같아 보이는 것처럼 구분되지 않는 매일은 하루하루를 개성 없는 모습으로 만든다. 자기만의 색을 상실한 일상은 점차 회색으로 변한다. 늘 스쳐 지나가는 거리, 항상 들리는 편의점,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가로수까지. 분명 여러 색으로 가득했을 거리는 점차 무채색이 되어가고 결국 도시 자체의 색채가 사라진다.


 파리는 내게 낯선 도시였다. 면밀히 말하자면 도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근대 도시의 시작이 런던이라면 근대 도시의 완성은 파리. 현대 도시의 시작과 끝이 뉴욕이라면 내가 살았던 서울은 동시대 도시의 시작일 것이다. 아직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시대, 콘템포-라리 동시대.

 20세기 후반 건축과 21세기 초반 건축의 영향을 모두 받은 도시인 서울에서 온 내게 파리는 도시가 아니었다. 고딕, 고전주의, 아르누보, 미니멀리즘 같은 과거의 유산들…. 엄청난 규모의 유적지 혹은 옛 도시의 표본으로 보였다.


 처음 살았던 고층 아파트에선 센 강과 파리 16구 전경, 그리고 넓은 하늘이 보였다. 하늘은 왜 이리도 파랗게 보이는지. 새하얗고 푹신한 호텔 베개 같이 생긴 구름들. 해질녘 오후엔 마법으로 빛바랜 해바라기를 섞은 듯한 라벤더 꽃밭이 펼쳐졌다. 클로드 로랑의 그림을 보면서 하늘을 아름답게 그리기 위해 과장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틀렸다. 그는 있는 그대로 하늘을 화폭에 옮겼을 뿐이었다. 그림 속 하늘이 내 눈앞에 있었으니까. 보고 있는 하늘은 나만 보기엔 너무도 아까워 영원히 남기고 싶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햇살이 가득한 날이면 공원과 광장에 사람이 모였다.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거나 연인과 애정을 나누거나 강아지와 뛰노는 사람들.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공중제비를 도는 어린 소녀부터 달걀과 밀가루를 던지고 노는 아이들, 여러 음식을 가지고 나와 피크닉을 즐기는 인파까지. 파리 시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햇살을 즐겼다. 내일이면 태양이 사라지기라도 하는지 자리를 옮겨 가면서까지 햇볕을 따라갔다. 바싹 구워진 공기는 갓 구운 빵 같은 냄새가 났다.


 서울의 6분의 1 크기인 파리는 걷기에 좋다. 센 강을 따라 걸으면 유명한 랜드마크가 계속해서 보였다. 노트르담 대성당, 퐁네프,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튈르리 공원, 알렉상드르 3세 다리, 에펠 타워….

 어느 도시에 가도 도시의 주인공이 될 자격을 갖춘 유일무이한 존재가 10분에 한 번씩 등장한다. 날씨에 따라 하늘에 따라 시간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파리의 풍경과 건물. 걸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는 거리. 시간과 체력만 허락한다면 매일 나가서 걷고 싶은 도시, 파리.


 파리에 살면서 나는 고민했다. 어째서 이 도시는 이토록 아름다울까. 이런 도시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시샘이 났다. 색채가 없는 도시에서 온 사람이 찾은 색채가 가득한 도시는 처음에는 감탄을 자아냈고 시간이 갈수록 고뇌에 빠뜨렸다. 대체 뭐가 다른 거지. 그 차이를 알기 위해 더 열심히 파리 거리를 걸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했던 뤽상부르 공원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서울의 거리를 떠올렸다. 내가 두고 온 것들에 대해. 내가 사랑하지만 미처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그 도시에 대해.


 그랬다. 나는 그 도시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서울이 색채가 없던 게 아니었다. 다만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예전의 나는 커다란 나무 옆을 무심하게 지나가는 행인이었다. 나무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파리에 오고 나서 새로운 삶에 도취된 나무 세부에 관심을 가졌다. 나뭇잎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 잎맥과 잎자루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가지는 무슨 수형으로 자라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파리의 건축물과 하늘, 사람들, 랜드마크에 관심을 가진 건 내가 이 도시의 매력을 찾고 싶기 때문이었다. 색채가 가득하게 도시를 걷는 방법은 바로 낯선 이방인의 시선을 가지고 도시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첫 번째 파리 체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인왕산에서 보이는 종로 도심은 21세기 도시를 대표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벚꽃이 만개한 영랑호를 푸르게 반사하는 하늘을 보고 나만 보기 아까워 물감과 붓을 사서 그림을 그렸다. 애월 방파제에서 아침부터 저녁나절까지 낚시하는 가족은 바다를 만끽했다. 광화문에서 덕수궁, 시청을 지나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과 DDP로 거리는 인상적이었다. 내가 사랑한 도시의 풍경들.


 다시 돌아온 파리.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 방심한 사람의 주머니를 노리는 소매치기의 눈빛, 남을 아랑곳하지 않고 피우는 담배, 길거리에 아무렇지 않게 다니는 쥐, 맡긴 돈을 달라는 것처럼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는 노숙자, 잔디밭에 누워서 책 보다 벌레에게 물린 상처. 언뜻 생각하면 진저리가 날 풍경들. 고개를 살짝 돌린다. 햇살을 담뿍 머금은 19세기의 건물이 보인다. 발에 채이는 반짝이는 알밤. 알밤을 보니 달콤한 몽블랑이 먹고 싶다. 콧노래가 나온다. 어느 곳이나 기쁨과 슬픔이 존재한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색채가 가득하게 걷는 방법은 있다. 그 방법을 간직한다면 나는 그 어떤 곳이든 색채가 가득하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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