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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설 Oct 01. 2020

Ⅰ. 고민 없는 삶은 없다

“제게 공부는 사치인가 봐요”

제자들을 상담하면서 사람은 겉모습만 봐서는 모른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좋고, 게다가 성격까지 좋아서 “쟤는 걱정이 없는 게 걱정이겠다” 싶은 제자에게도 생각지 못한 고민이 있었다. 반대로 특별전형으로 입학해서 공부 실력이 좀 떨어지고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겠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짠해서 이야기를 나눠 보면 세상 긍정은 다 가지고 있어서 도리어 나를 숙연하게 만드는 친구도 있었다.  그중에 세상 걱정 없는 부잣집 외동아들처럼 생긴 이가 떠오른다.  

어느 날 페이스북에 제자 민재의 글이 올라왔다. 지금 남미를 여행 중이고 아프리카로 여행을 가야 하는데 지금 자기가 너무 어려운 처지라 돈이 부족하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덧붙여서 그럼에도 아프리카에 꼭 가고 싶다고, 자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자기를 도와주면, 살면서 꼭 갚겠다는 절절한 호소였다.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고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형편이 아니라고만 했다. 

‘여비도 없이 무슨 해외여행…….’

그 글을 읽고 처음에는 다소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민재의 절절한 호소가 눈에 밟혔다. 

‘넓은 세상 돌아다니며 많이 느끼고 배워서 앞으로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민재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물어보며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공부가 정말 재미있어서 하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다닐 적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래, 호기심이 많은 민재다운 행동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엽이라고 공개적인 SNS에 대고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었을까. 그만큼 그 여행이 간절했으리라. 

녀석의 용기가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미에, 또 거기에서 아프리카행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여행길을 택한 민재의 선택에 힘이 되어 주고 싶어서 나는 계좌번호를 알려 주면 입금하겠다고 페이스북에 답장을 남겼다. 녀석은 정말 고맙다는 말과 함께 하트(♥)까지 뿅뿅 날리고 계좌번호를 알려 줬다. 나는 즉시 30만 원을 입금하고는, 민재에게 그 돈은 나중에 사회에 필요한 인재가 되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쓰면 된다고 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민재한테 전화가 왔다. 민재는 K 대학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되었다는 소식과 S전자에 입사하게 되었다는 두 가지 기쁜 소식을 동시에 전했다. 그리고 여행 중에 보내 준 돈이 너무 감사했다며 소주 한잔 대접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선술집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의 엔진이 예열되자 민재는 차분하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교에서 봤을 때 민재는 귀티 나게 생겨서 귀족 학교 학생답게 잘사는 집안의 자식인 줄 알았다. 그래서 당연히 페이스북에 올라온 여행 경비 support 글이 치기 어린 장난이리라는 생각이 조금은 있었다.

민재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경제적으로 그 정도로 안 좋은지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버지가 하는 사업이 나빠지면서 갑자기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 힘겹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사정상 외할머니가 계신 천안으로 내려가서 함께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두 가지 기쁜 소식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씁쓸한 소식이었다. 

“선생님, 제게 공부는 사치인가 봐요. 이제부터 사치라고 생각할래요.” 

민재는 기꺼이 S전자에 입사해 돈을 벌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도 경제적으로 궁핍해 언제나 어려웠지만 시간을 쪼개고 쪼개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용돈을 마련했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하루하루가 정말 힘들었는데 이제는 S전자에 취직했으니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지금 민재는 S전자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공부도 사치고, 연애도 사치고. 어쩌면 결혼은 꿈도 못 꿀 것 같아요. 결혼은 그저 환상일 뿐이네요. 언제쯤 돈을 모아서 집을 살 수 있을까요. 저는 부모님까지 모셔야 하는데. 그래서 그냥 혼자 살면서 부모님이 편하게 사실 수 있는 작은 집이라도 마련해 드리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아요.”

민재가 장학금을 받고 대학원에 다닐 수 있는데도 S전자에 입사한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안정되게 돈을 벌어야 잠이라도 좀 편하게 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마나 시간에 쫓겨서 허덕였으면 편하게 잠을 자는 게 소원이었을까. 

자기에게 “공부는 사치”라는 민재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좋아하는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민재가 안쓰러웠다. 그런데 한편으로, 자신이 놓인 현실에서 자기 자신에 앞서 가족을 생각하며 앞길을 선택하는 책임감 있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기성세대는 요즘 젊은 세대가 귀하게 자라서 이기적이고 나약하고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흔히 말하는데 지나친 일반화라고 생각한다. 어떤 세대가 그렇고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느 세대에든 이기적이고 나약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준엽이를 보며 들었다.

인생 행로가 바뀔 수도 있는 그 선택에 남미로, 아프리카로 먼 길을 여행하며 그 길에서 한 새로운 경험과 성찰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민재의 선택을 무조건 응원한다. 

인생 행로는 일직선으로만 뻗어 있지 않다. 가다 보면 큰길도 있고 오솔길도 있고 흙길도 있다. 지금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영원히 그 길로만 가라는 법은 없다. 행로를 변경할 나들목에 들어설 수도 있을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민재가 그 뜻을 잃지 않는다면 좋아하는 공부를 꼭 할 때가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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