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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설 Oct 01. 2020

Ⅰ. 고민 없는 삶은 없다

인생 수업료를 냈던 교사 생활

열정적이었으나 힘들었던 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보통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교사가 되는데 내 경우에는 석사에 박사까지 마친 뒤 교사가 되었다.

원래는 대학교 강단에서 교수로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전공이 영어교육이다 보니 현장에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어떻게 하면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지 연구해 보고 싶었다. 게다가 교육학 관련 논문은 현장에서 이루어진 실험을 바탕으로 해야 이론(가설)에 대한 논거를 분명하게 세울 수 있는데 이런 연구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고민 끝에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필요한 모든 시험을 통과해서 영어 교사가 되었다.  

다행인 것은 정교사가 되려면 교사 자격증이 필요한데,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도 교생실습을 비롯해 교사 자격증과 관련된 필요한 과정을 이수해서 자격증을 취득해 놓았었다. 당시에는 유학 중에 한국을 오가면서까지 할 만큼 내 인생에서 교사 자격증이 과연 필요할까 싶었는데 ‘이왕 공부를 시작했으니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렇게 2005년 용인한국외국어대학교부설고등학교(이하 외대부고)의 창립 멤버로 출발해서 2016년까지 11년 동안 재직했다. 

다른 선생님들보다 다소 나이가 많았지만 깊이 있게 공부하고 해외에서 많은 경험을 한 것이 영어 선생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 외대부고는 신생 고등학교여서 교과과정 수립부터 시작해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그러자니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여섯 시에 출근해서 자정에 퇴근하는 쳇바퀴 도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었을 법도 한데 기숙학교―외대부고는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한다―에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제자들을 생각하면서 모든 노고를 보람으로 승화할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진심으로 제자들과 소통하고 교감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제자들도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상담을 하러 왔다. 입시 상담을 하다가도 가족, 친구, 이성 관계 등 자연스럽게 인생 상담으로 이어졌다. 한 명 한 명이 저마다 특별한 아이들.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정말 좋았다. 그런 마음이 통했는지 많은 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서도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온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맺은 인연이 그 후로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정말 좋았지만 직장으로서의 학교는 또 달랐다. 나는 공부만 하다가 외대부고에 들어가서, 사회생활 경험이 적고 직장 생활 경험은 더더욱 없어서인지 생활하기가 녹록하지 않았다. 나에게 학교는 정글처럼 느껴졌다. 

직장이라면 어디든 스트레스 받을 일이 있기 마련이지만 업무에서 생기는 스트레스야 내가 열심히 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어느 정도 풀어진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는 답이 없었다. 

학교에도 정치와 야욕이 도사렸고 교장과 교감을 향한 때로는 보이지 않는 때로는 눈에 보이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관리자 자리는 한정된 상황에서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에서 빚어진 알력과 경쟁이 보였다.

처음에는 ‘굳이 왜 저렇게 살아야 하지’라고 의아스러웠는데 그것은 나만의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날마다 살얼음판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냉혹하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학생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도 맹위를 떨쳐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건 아니지 않나’ ‘이건 아닌데’라는 문제의식이 내 안에서 조금씩 꿈틀거리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실마리, 돌파구가 필요했다. 돌파구가 필요한 것은 마음뿐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교 일에 매달리면서 몸을 혹사했는지,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몸이 힘들다 보니 열정이 예전 같지 않고 권태가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같이 있다가 먼저 사회로 나간 친한 동생을 만났다. 그는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더는 버틸 수 없다며 학교를 떠난 것이다. 그 친구가 내게 단도직입적으로 충고했다. 

“형, 거기서 왜 그렇게 살아? 당장 그만두고 나와.” 

그 충고에 힘입어 나는 과감하게 사표를 냈다. 더 이상 학교(직장)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그렇게 나온 세상은 황금빛 무지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역시나 세상살이는 만만찮았다. 내가 가진 학력과 경력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챙기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또 한 번 사회생활의 쓴맛을 봤다. ‘내가 더 강해지지 않으면 정말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구나’를 뼛속 깊이 느꼈다. 한편으로는 ‘나도 저들처럼 남을 착취해서 단물만 쏙 빼 먹으며 살아야 하나’ 생각하니 머리털이 주뼛 서는 기분이었다. 

학교 밖 세상에 나와서 생각해 보니 학교도 괜찮은 곳이기는 했다. 바깥세상은 정말이지, 미지의 정글이었다. 그러나 학교로 다시 돌아가라면 굳이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학교에서, 그리고 학교를 나와서 정말 버라이어티하게 인생의 여러 맛을 경험하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무너지겠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한 번뿐인 인생, 하나뿐인 나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길은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었고, 내가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직장으로서의 학교에서 나는 스트레스와 상처라는 인생 수업료를 지불했지만 그때의 경험이 동기가 되어 인간관계, 행복한 인생에 대해 성찰하게 되었다. 조직생활에서,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아니, 크든 작든 누구나 힘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어려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누구든 덜 힘들지 않으려면 조직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리더가 할 일은 무엇인지, 조직 구성원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나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나갔고, 그런 생각으로 소통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린아이에서 어르신들까지 연령대를 막론하고, 기업체, 교육기관, 의료계, 대학교 등 각종 단체에서 행복학을 강연한다. 한 번 사는 인생, 기왕이면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는가. 내 모든 강연과 소통이 이르는 곳이 ‘행복’인 이유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길을 함께 나눌 것이다. 그리고 늘 꿈을 꾸며 내 꿈을 향해 언제까지든 전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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