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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훈이 Aug 02. 2018

나이 많은 신입사원 일기 - 뜻밖의 사건(1)

허허허허허 그저 웃지요


D-day까지 약 3주의 시간이 남았다.

퇴사 날 받아두면 회사 생활이 그렇게 재밌고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신경이 하나도 안 쓰인다던데.

생각만큼 그렇게 편안하진 않았다.

늘 그랬듯 매일이 전쟁이었고 챙길 게 많았다.

그래도 새로운 업무가 추가되지 않아 부담은 확실히 덜 했다.



틈틈이 머리 속으로 퇴사 계획을 세웠다.

'남은 시간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업무를 처리하고,

인턴 친구에게 완벽하게 인수인계를 하고,

2주 전쯤부터 친하게 지냈던 직원 분들께 인사를 하고,

1주 정도 남았을 때 지사장님과 개인적인 자리를 가져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하고,

당분간은 이 동네 안 올 것 같으니까 점심시간마다 근방 카페 탐방을 해야겠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퇴사를 2주 남겨둔 어느 일요일 저녁.

나의 계획을 뒤흔든 사건이 터졌다.



시작은 평소와 다를 거 없는 주말이었다.

토요일 신명 나게 술을 마시고

일요일 오전 느지막이 일어나 동네 빵집에 갔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언니에게 연락을 했는데, 언니는 밥을 먹지 않겠다 했다.

서로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대화가 잠시 오갔지만 아닌 척 전화를 끊고 그 길로 백화점에 가 충동구매를 했다.

어차피 혼자 먹을 밥, 저녁을 먹고 들어갈까 싶었는데 퇴사하는 마당에 돈 좀 아끼자 싶어 집으로 향했다.



집에 와서 보니 언니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풀리지 않은 나는 퉁명스럽게 인사를 건네고 냉동실을 뒤져 꽁꽁 언 바게트를 꺼냈다.

그리고 해동도 되지 않은 빵을 반으로 가르려 열심히 칼질을 했다.

당시 내가 사용한 칼은 물결무늬 과도로, 슥슥 톱질하듯 자르면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돼서

평소 애용하던 것이었다. (힘은 덜 들지만, 그만큼 깊게 베이기 쉽다.)



심통난 마음이 풀리지 않아 주방에서 혼자 우당탕탕하고 있었던 그때 일이 터졌다.

바게트를 세로로, 원통처럼 세워두고 자르다가 그만

나의 왼쪽 두 번째 손가락, 두 번째 마디를 함께 건드려버린 것이다.


도마 쓰는 걸 귀찮아해서 평소에도 내가 칼질하는 걸 보면 불안하다는 사람이 많았는데,

결국 사고가 났다. (띠로리...)


요리하다 보면 칼에 베일 수도 있다지만, 문제는 평소처럼 살짝 스친 느낌이 아니었다.

조금 적나라하게 적자면 뼈를 '긁는' 느낌.....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과 멈추지 않는 피에 몸이 절로 떨렸다.

냉전이고 뭐고 플랭크하고 있는 언니를 다급하게 불렀고,

종일 집에 있느라 씻지도 않았던 언니는 눈썹만 그리고 나와 함께 응급실로 향했다.




일요일 저녁 8시에 도착한 대학병원 응급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바빴다.

대기실엔 환자가 이미 가득했고 쉴 새 없이 응급환자가 이송되어 왔다.

접수를 하고 나니 40분을 기다려야 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피를 흘려보는 건 처음이라 쓰러지면 어쩌나 무서웠다.

진료를 조금 앞당길 순 없는지 여쭤보니

생사를 오가는 응급환자가 아닌 이상 기다려야 한다며, 지금 교통사고로 실려 들어오는 분들도 계시니차례를 기다리라고 하셨다.

아무리 남의 중병보다 내 감기가 더 아프다지만

어쩐지 머쓱해진 나는 얌전히 대기 의자에 앉았다.


핸드폰을 보았다가 tv를 보았다가,

언니의 어깨에 기대어 쉬다가,

빨개진 휴지를 계속해서 갈았다가,

종일 아무것도 못 먹은 게 생각나 챙겨 간 초콜릿도 한 알 먹었다.

'넌 그 와중에 초콜릿을 챙겨 왔냐?'는 언니의 물음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웃었고, 우리는 자연스레 화해했다.



진짜 40분 정도가 흐르고 나서야 내 차례가 왔다.

어렵게 들어간 응급실인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수술 중이신 선생님을 만나려면 2시간 이상을 또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배고파 죽겠는데요.......’


깊게 베어서 피가 멈추지 않는 것일 뿐 별 일 아니라 생각한 나는,

간호사 선생님께 지혈만 하고 내일 다시 와서 의사 선생님을 뵙겠다 했다.

그래서 붕대를 돌돌 말고 17만 원을 결제하고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시계를 보니 11시.

놀란 마음도 가라앉고, 7천 원 아끼려다 17만 원 쓴 상황에 실컷 웃고 나니 허기가 밀려왔다.

그래서 언니와 나는 묵은지 닭볶음탕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단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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