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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험미 Oct 13. 2024

가마르조바, 조지아 2

어서 와, 조지아는 처음이지. 어서 왔어요, 조지아는 처음입니다.

에어 아스타나(카자흐스탄, 알마티 경유)를 타고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카자흐스탄 여권을 가진 많은 승객들이 긴 질문과 함께 종종 작은 방으로 불려 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 여권을 가진 나와 남편에게는 '조지아는 이번이 처음인가요'라는 간단한 질문 외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출입국 심사가 끝났다.

어느 나라나 출입국 심사 직원은 무표정하기 마련이고, 나는 미리 숙지해 둔 몇 안 되는 조지아 말을 건넸다.


마들로바.(조지아 말로 감사합니다)


커다란 갈색 눈, 진한 아이라인, 무뚝뚝한 얼굴에 예기치 않게 터져 나온 미소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매력적인 얼굴에 피어오른 수줍고도 환한 미소란.

내가 남자였다면 바로 반했을 것이다.


조지아를 들어서며 본 그 미소가 여독까지 떨쳐버린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여행을 하며 조지아 사람들에게서 거의 환한 미소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무하다는 의미는 아니고, 즐거운 미소와 웃음도 분명히 있었다.

다만, 대체적으로 조지아 사람들은 굉장히 무뚝뚝하고 표정이 한껏 굳어 있는 느낌이다.

하다못해 계산을 하며 디디 마들로바(매우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대꾸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가령 지하철에 가득 들어찬 한국 사람들의 얼굴은 다른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무표정이 기본이고 거기에 다소 신경질적이거나 지친 얼굴이 깔려있을 수 있다.

그에 반해 조지아는 타인에게 관심이 아예 없는 얼굴은 아니다.

타인에게 시선을 주지만 눈빛엔 온기가 없고, 표정은 잔뜩 굳어있다.

한국 사람들이 일부러 약간 까칠하고 예민한 듯한 인상을 하고 있는 느낌이라면,

조지아 사람들은 일부러 인상을 잔뜩 굳히고 입을 꽉 다문 느낌이다.

(이 모든 것은 순전히 나만의 주관적인 견해이다.)


그래서 음식점, 상점, 대중교통, 관광지 같은 대개의 장소에서 우리 부부는 조지아 사람들이 친절과는 거리가 먼 경향이 있다고 느꼈다.

심지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호텔 직원에게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글의 제목처럼 조지아 사람들이 '어. 그래. 어서 와, 조지아는 처음이지!'라고 다소 퉁명스러운 얼굴로 딱딱하게 물으면.

우리는 '네, 어서 왔습니다. 조지아는 처음입니다.'라고 조곤조곤 말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주관적인 경험이고, 조지아에서 모든 경험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마트에서 만난 아랫니가 거의 전부 다 빠져버린 아주머니가 그랬다.

우리는 짜도 너무 짠 조지아 음식에 숨 좀 돌리려, 닭이라도 백숙으로 삶아 먹을 계획이었다.

(해외에서 현지식을 거부한 것 또한 우리 부부가 처음 경험한 일이었다.)

적당한 크기의 닭을 고르자, 아주머니가 무뚝뚝한 얼굴로 우리가 고른 닭을 손에서 뺏어가듯 받아갔다.

무게를 재기 위한 거였다.

닭을 무게 대로 파는구나 생각하며, 며칠 만에 입에 붙은 마들로바(감사합니다)라고 하니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는다.

숭숭 빠진 이를 활짝 드러내며.

이 무뚝뚝함 뒤에는 이런 미소도 숨어 있을 수 있구나 깨닫는다.

닭을 고르고, 마늘을 고르고 있으니 아주머니가 옆에 와서 대기하고 있는다.

고른 마늘을 활짝 펼쳐진 손에 주니 또 씩 웃는다.

이가 슝슝 빠진 미소가 매우 중독적인 매력을 지녔다.


조지아 입국 심사 직원의 환한 미소만큼이나, 마트 아주머니의 이가 슝슝 빠진 환한 미소도 내 마음에 남았다.


트빌리시 시내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는 조지아 어머니 상이라고, 거대한 여인 형상의 구조물이 있다.

조지아 어머니 상은 한 손에는 와인 잔을 들고, 다른 손에는 검을 들고 있다.


이 어머니 동상은 손님에게는 와인을 내주어 환대하고, 적은 기꺼이 칼을 들어 방어하고 물리친다는 상징의 의미가 있다.

그만큼 조지아 사람들은 이방인을 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조지아인 가이드가 이끄는 세 번의 데이 투어에 참석했는데, 세 명의 가이드 모두 조지아 사람들이  hospitality(환대, 접대)를 잘한다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 설명에 좀 갸우뚱했었는데... 마트 아주머니를 보니 조금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카즈베기 시내의 마트에서 본 분이다.

(카즈베기는 코카서스 산맥에 둘러싸인 마을이다. 3000~5000미터 급 산들이 줄줄이 이어진 코카서스 산맥이 절경을 이루는 멋진 곳이다.)


카즈베기 주타 트레킹
카즈베기 주타 트레킹
카즈베기에서 바라본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

아주머니를 보며, 어쩌면 이 아름다운 풍광 때문에 무뚝뚝한 얼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만년 설산을 평생 바라보고 살아서 일 수도.

척박한 환경은 웃을 일이 없고, 대개는 험준한 산맥처럼 차갑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 안에 슝슝한 미소를 품은 채로.


조지아 사람들은 일테면 츤데레의 전형이다.

무뚝뚝하고 딱딱한 겉모습 안에 챙겨주려는 속 정이 숨겨져 있다.

그들은 가볍게 씌워진 그 무뚝뚝한 얼굴을 깨부술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는 여지없이 여린 속내, 숨겨진 환한 미소를 들킬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조지아 사람들이 무감정한 얼굴로 당신을 마주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한 겹 아래 감춰진 미소에 조금 더 접근한 것이다.

지하철에 가득 찬 한국인도 무표정하지만, 누구보다 뜨겁고 흥이 많은 민족 아닌가.

조지아인도 우리처럼 겉과 속이 상당히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간혹 마들로바, 디디 마들로바(매우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에도 무뚝뚝한 얼굴로 무반응이더라도 섭섭해하지 말자.

아직 우리가 문을 덜 두드린 것뿐이다.

끝내 문이 안 열리더라도, 그것 또한 조지아의 한 부분일 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우리는 잠시 그들의 일상을 엿보기 위해 끼어든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일 뿐이니까.


아! 꽃을 파는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에게 숨겨진 미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다.


그분들은 사진을 찍으면 어떤 이유에서건 무조건 소리를 지른다.

여행 첫날 아침에 제일 먼저 그 일을 겪고 현지 가이드에게 물으니, 꽃 파는 분들은 절대 사진 찍지 말란 말을 들었다.

그분들은 사진 찍는 그 누구에게든 고함을 치거나 욕을 한다며.

다행히 우리에게만 소리 지르는 것은 아니니, 실망하거나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행 첫날의 아침, 처음으로 이 사진을 찍고 우리도 기념으로 할머니의 고함을 들었다.


조지아 여행을 마칠 쯤엔 그런 생각을 했다.

친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타인에게 미소가 후한 사람이었나.

타인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본 게 언제이더라.


나의 미소도 조지아 사람들의 그것처럼 희소해서 너무나 값진 것은 아니었나.

무뚝뚝함으로 무장한 채 미소 한 번 짓기를 어려워하지 않았나. 


어쩌다 마주친 그들의 미소는 너무 반갑고 고맙게 느껴졌는데.  

누군가에게 반갑고 고마운 사람이라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가. 


조지아 사람들을 보며 다짐했다.

미소가 후한 사람, 친절이 헤픈 사람이 되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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