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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험미 Sep 13. 2024

타임어택을 지켜보는 여자 1

불행은 학습된다, 프로그래밍된 불행

*타임어택- 제한된 시간 안에 미션을 최대한 빠르게 완수하는 것.


몇 년 전 나는 회사 생활에 치여 헤어 나올 수 없는 극도의 회의감에 빠져있었다.

도대체 이렇게 간신히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무기력감에 허우적거렸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회사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내가 알아채지 못한 어느 때부터인가 무력감은 정반대의 감정으로 변신해 있었다.

끓어오르는 활화산 같은 모습, '화'였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용암을 인지했을 때, 나는 나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누군가 건드려 주기를 기다리는 꽉 차오른 분노의 결정체 같았다.  

화산 폭발을 기다리는 마그마 같은 행색으로,

매일매일 악에 받쳐 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누가 나에게 불씨만 던져준다면 나는 언제든 분출할 준비를 마친 상태로 일상을 버티고 있었다.

좋지 못한 의미로 임계점을 넘어서기 직전이었다.  


나는 내가 품은 마그마가 얼마큼 위험한 요소인지 감지했다.

특히나 그 누구든 내게 아주 작은 잘못이라도 하면 나는 그것을 조금도 참아 넘길 수 없었다.

여유롭게 상황을 이해하며 아량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바늘구멍 하나만큼도 참아 넘길 수 없는 밀봉된 마음 상태가 나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그 마음은 남편을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

그대로 둬선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나는 상담사를 찾았다.

상담을 신청할 때 나는 흔히들 말하는 '분노 조절 장애'를 이유로 들었다.


나는 내 분노를 현명한 방법으로 다스리기 위해 상담실을 찾았는데.

상담은 처음부터 내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상담사와 얘기가 조금 진행되자, 나는 어느새 내 과거.

정확하게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 폭력적인 가정환경.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과 가정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담 회차가 진행될수록 나는 내 감정과 생각과는 전혀 관계없이,

매 상담마다 눈물을 쏟는 나 자신을 마주해야만 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눈물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웬만해선 거의 울지 않는 사람이었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폭력적인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내내 내 감정은 무감했고, 나는 솔직히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런데도 부지불식간에 흘러내리는 눈물에 나는 상담 내내 곤혹스러운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은 내 친구 A와 B의 앞에서 가정사를 털어놓기도 전이었고.

대강의 사정만 알고 있는 남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도 전이었다.

내가 지니고 있던 기억과 고통에 대해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경험이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나는 몇 번의 세션을 부부 상담으로 요청했다.  

나의 '화'가 부부사이에, 특히나 남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남편은 내 분노의 과녁이 되었고 내 화살은 여지없이 남편을 관통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상담실을 찾았다.


어느 날 상담사가 얘기했다.


"남편과 아버지는 전혀 다른 사람인데, 남편에게서 아버지를 겹쳐 보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랬다.

상담사의 말처럼 남편은 조금도 아버지를 닮지 않은 사람이었다.

남편은 다정다감하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알고, 배운 사람이었고,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 달에 몇 번 되지 않는,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그나마도 거의 대부분은 일과 관계해서 술을 마시고 늦는 날이었다.) 나는 남편과 아버지를 완벽하게 겹쳐서 보았던 것이다.


"맞아요. 그랬나 봐요."


나는 남편에게 분노를 터뜨린 날들을 차근히 되짚었다.


"어둑한 시간, 술 마신 사람이 풍기는 특유의  냄새, 술 마신 사람들의 늘어지는 말투, 눈빛,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는 상황, 술 취한 사람들의 분위기... 제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요."


하나하나 떠올려 보던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는 술 취한 사람을 상대하는 걸...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술 취한 사람=아버지로 겹쳐서 보았을 것이라는 침묵의 동의가 상담실 내에 흘렀다.

남편과 상담사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내 인식 속에 술 취한 사람은 그게 누구든 곧장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며 거부했던 것이다.

스스로 아버지란 굴레를 어깨에 둘러업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때서야 나는 남편의 모습을 좀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남편은 아버지와 전혀 다른 사람이란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충격으로 멍했다.

(어찌 보면 그 충격이란 것도 우스웠다.

얼마나 스스로의 아집에 붙잡혀 있었으면, 내가 틀렸다는 사실이 충격일 수가 있을까.

나는 내가 얼마나 내가 판단하는 기준, 내가 세운 옳고 그름의 잣대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화를 냈던 순간에 분명 나는, 내가 화를 내도 되는 상황이라는 당위성에 대해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걱정하실 것 없어요. 상황은 희망적입니다."


의아해하는 내게 상담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아버지와 전혀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셨잖아요. 그 사실만으로도 긍정적입니다."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

이어진 상담사의 말에도 나는 또 놀랐다.


"아주 불행하게도 많은 분들이 아버지와 똑같은 남자를 만나 똑같은 상황으로 괴로워하면서 상담실을 찾아옵니다. 그러면 정말 너무 힘듭니다. 결국엔 같이 펑펑 울 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불행은 학습된다.


내가 어릴 때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말이다.

내가 이 생각을 확고하게 뼈에 새긴 것은 내 첫 연애에서였다.


대학에 갓 입학한 나는 원치 않았던 학교와 학과에 별 흥미가 없었고, 학교 근처에서 시작한 아르바이트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또래가 많았던 그곳에서 나는 한 사람을 만났고 첫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정말 다시 생각해도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매사 비관적이며, 알코올 중독자였다.

일상생활은 하는데, 매일 소주 2병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 첫 연애의 시작은 달콤했지만, 나는 그 연애의 마지막에서 젊은 알코올 중독자의 끝을 보았다.

나는 그 연애를 통해 중대한 교훈을 얻었고, 이를 뼈에 새겼다.


'불행은 학습된다.'라는.


늘 술을 마시는 분위기, 술을 마시고 그가 하는 행동의 양상들, 그가 내뿜는 모든 것이 나에게는 불편한 가운데도 어떻게 보면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환경은 그것의 좋고 나쁨을 떠나 사람에게 안정감을 선사한다.

그 사람은 내가 스무 해 동안 겪었던 경험의 총체 같은 사람이었고, 나는 쉽게 그 익숙함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내 안에는 분명히 학습된 불행이 존재했다.


나는 그때 그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했고, 그래서 이후 악착같이 아버지와 완벽히 반대되는 남자를 찾았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이 보이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교훈을 발판 삼아 나는 아버지와 정반대의 남자를 배우자로 선택하게 되었다.

정말 나에게는 천만다행이다.

(부디, 남편에게도 다행이어야 할 텐데.)


나는 이렇게 학습된 불행이 아주 불쾌하고 두려웠다.

만약 내가 자식을 낳으면 자녀에게도 똑같이 학습될 것 같았다.


어쩐지 나의 글이 내가 아이를 갖지 않는 핑계의 무덤이 된 것 같아 어지러운 기분이 들지만,

그 사실도 내가 아이를 갖지 않은 아주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사실 여전히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불행은 학습된다.'


내 생각이 맞고 너는 틀리다고 하는 아집에 사로잡히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여전히 고집스러운 것을 보면 다시 한번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된다.

내가 가진 기질과 학습된 환경이 '불행'이란 이름으로 고스란히 대물림될 것이라는.

그런 내 마음속 핑계에 일침을 가하듯, 상담사 분이 좋은 조언을 해주시며 우리의 부부 상담을 끝내주셨다.


"내담자분 안에 스스로를 긍정하는 힘이 있으니, 충분히 좋은 상황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상담을 통해 해결해 나가겠지만, 상담사는 그 부분에 관해 개인 숙제를 남겨주었다.


"상대방을 바꾸려고 할 게 아니라, 내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변해야 상황이 바뀝니다."

 

이것은 애초에 상담을 시작했던 '화와 분노'를 다루는 방법에도 적용되는 답이었다.


상대방에게 화를 내는 것, 분노를 터뜨리는 것.

상대방이나 상황은 바뀔 수 없고, 오직 그것에 반응하는 나의 모습만 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상담만으로 바꿀 수가 있겠나.

상담을 통해 깨닫고, 기회를 얻고, 우리는 그 기회를 발판 삼아 나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학습된 불행은 이미 내 안에 하나의 견고한 메인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저 홀로 연산하며 결괏값을 도출해 내는 프로그래밍된 불행을 고쳐나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수식을 하나씩 뜯어고치는 과정은 분명히 재미없고 지난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내가 끊임없이 수련해 나가야 할 인생의 과업인 것이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이제 내 인생의 숙원 사업이다.


상담이 진행되며 나는 나의 과제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하게 되었고, 한시적 일지는 몰라도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바뀐 나의 태도.

그렇게 상담이 꽤 진행되고, 상담의 마지막에 가서 나는 한 가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상당히 오래된 고민이면서도, 늘 떠오르는 즉시 외면해 버리곤 하는 문제였다.


"제가 나이가 든 만큼 부모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드셨습니다. 만약, 갑자기 돌아가신다면... 저에게는 이 해결되지 않은 숙제들이 영원히 마음의 무거운 짐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게 그동안의 상처에 대해 말하고픈 욕구.

한평생 일만 하며 고생한 아버지에게 인간적인 인정과 감사를 전하고픈 마음.

서로의 상처를 용서하고 보듬어 주고 싶은 아주 미약한 바람.

그 모든 과정에서 제발 평온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되는 한 사람, 엄마와의 허심탄회한 대화 등등.


"저는 이기적인 존재라 남은 생 내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고 싶지 않은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습니까."


용서를 해주고픈 마음조차 무게가 되며,

행복을 바라는 마음도 짐이 된다.

이 짐들은 그들이 존재하고 있을 때 비교적 투명하다가, 그들의 부재 시에 그 무게감을 고스란히 드러낼 것이다.


나는 이 짐을 내려놓고 싶다.

이 짐의 무게에서 자유롭고 싶다.

이것은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가 사라진 후에 내가 살 방도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나 편하자고 하는 고민이다.


부모와 나 사이에는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미션)가 있다.

남겨진 그 미션에는 시간제한이 걸려 있다.

게임의 타임어택과 같은 것이다.


째깍째깍.


제한 시간이 얼마 남아있는 지조차 모르는데,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나는 상담이 끝난 지 제법 시일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타임어택을 지켜보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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