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무계획 제주여행(23) 다시 혼자, 다시 바다. (230131)
동기들이 모두 떠나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계속 혼자서 시간을 보내면 혼자인 것도 잘 모르면서 지내는데 북적이던 주변이 고요해지면 혼자라는 사실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어차피 인간은, 그리고 인생은 혼자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들과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산다 해도 내가 혼자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 사실을 직면하고 수용하니 많은 것들이 편안해졌다. (현재로선 결혼 생각이 있지만) 비혼으로 사는 삶이 두렵지 않았고 아이가 없는 삶이 걱정되지 않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타인을 의지하는 순간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나는 나 하나뿐이며, 나의 모든 순간을 함께할 사람은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 그걸 알고 있는 지금으로선 혼자든 둘이든 여럿이든 모든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나로서 사는 삶, 혼자 왔으니 혼자 돌아가는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하며 아침을 챙겼다.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이제부터는 냉장고 파먹기를 해야 하니 얼려놓은 베이글을 쪄먹었다. 쪄먹는 베이글은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더군다나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함께하니 두 개나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그렇게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나갈 준비를 했다. 나갈 준비를 하며 용머리해안 개장시간을 확인했는데 오늘은 가볼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오후 4시 반까지 입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동기들과의 여행이 끝나니 날이 갠 것 같은 느낌은 그저 느낌이겠지.
용머리해안에 가기 위해 서귀포 터미널에서 202번 버스를 찾았다. 이번에는 전처럼 실수하지 않으려고 산방산 방향인지 제대로 확인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10분쯤 기다렸을까? 버스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역시 종점에서 출발하면 좋은 점은 고지된 시간에 정확히 출발한다는 점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12시 9분이 되자마자 칼같이 출발했다. 버스는 달리고 달려 용머리해안 근처인 산방산 정류장에 나를 내려주었다. 용머리해안만큼이나 유명한 산방산에는 대웅전과 부처상도 볼 수 있었는데 산이나 절을 좋아하면 한 번쯤은 들러봄직 했다. 그런데 난 그 어느 쪽도 아니었기 때문에 용머리해안을 방문하기로 했다.
용머리해안 매표소라고 적힌 표지판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소 경사가 있는 내리막길이라 약간 위험할 순 있지만 길이 잘 닦여 있어서 편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카페와 잡화점들을 지나 매표소에 도착했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1인당 2천원이었다. 심지어 65세 이상 어르신들과 도민들은 무료입장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나라는 관광명소 입장료가 너무 저렴한 것 같다. 물론 저렴한 가격이어야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좋은 것도 맞지만 너무 저렴하면 관광지의 가치를 그 정도로만 취급하게 되는 태도도 분명 고려해야 할 포인트라는 생각이 든다. 해외의 다양한 박물관이나 명소들은 물가를 생각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저렴한 곳은 거의 없다. 적어도 그 명소가 가지고 있는 가치에 맞는 값을 매겨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대신 경제적 여유가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더 큰 폭으로 할인을 적용해 주면 합리적인 가격 책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계산을 마치고 티켓을 끊었다.
티켓을 받아 들고 입장한 순간 용머리해안의 탁 트인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윤슬이 더욱 돋보이는 날이었다. 아직 용머리해안을 다 걸어보진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오늘 만나게 될 제주는 내 마음의 쏙 들 거라는 걸.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용머리해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용머리해안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제주바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우선 날도 너무 좋았던 데다가 내가 제주에서 보았던 모든 바다의 색이 용머리해안에 다 담겨있는 듯했다. 에메랄드부터 짙은 푸른색, 검푸른색까지 '바다'색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색들을 다 만날 수 있었다. 또한 내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세월이 켜켜이 쌓인 절벽들 역시 장관이었다. 이곳을 놓치고 제주여행을 끝마쳤다면 너무 아쉬워서 여행기간을 연장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모든 순간을 허락해 준 자연에게 너무 감사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내가 선글라스를 챙겨 오지 않았다는 것. 겨울이라 선글라스는 필요 없을 줄 알고 서울에서부터 챙겨 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맑은 날에 용머리해안이 눈부실 줄 알았다면 꼭 챙겨 왔을 것이다. 다음엔 겨울여행이어도 꼭 선글라스를 챙겨야겠다.
용머리해안 후반부로 가니 절벽은 산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바위를 깎을 듯한 파도가 철썩이는 지점에서는 파도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다. 파도가 부딪치는 데에는 의미가 없다. 지구와 달의 움직임, 그리고 중력의 작용 때문에 파도가 치는 것일 뿐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세포의 작용에 따라 살고 죽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파도와는 달리 인간은 본인의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발걸음의 방향을 정할 수도 있고 속도도 조절할 수 있다. 나의 걸음은 얼마나 빠른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향해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쳐대는 파도를 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용머리해안 관람을 마치고 황우치해안으로 향했다. 오르막길이라 꽤 더워서 패딩을 벗고 맨투맨인채로 길을 올랐는데 그 길에 하멜기념관을 만났다.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알쓸신잡을 통해 알게 되었고, 그가 이 장소에 도착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조선시대에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의 등장이라니. 13년 간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을까 생각하니 상상조차 어려웠다.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잠깐 살펴보고 다시 황우치해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옆으로 난 길로 따라가면 황우치해안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옆으로 걸어가려던 찰나, 황우치해안 뒤로 한라산이 보였다. 눈 덮인 한라산을 보며 절경이다 생각하고 있는데 사진을 찍던 할아버님께서 내게 말을 거셨다. 원래 이곳에선 한라산을 보기 어려운데 어제와 오늘은 볼 수 있다고, 복이 많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늘 복이 없다고 생각했다. 복이 따라서 무언가가 잘 되었던 적은 별로 없고 요령 없이 100퍼센트를 쏟아야만 딱 100퍼센트에 해당하는 결과만을 얻었다. 110, 120퍼센트도 아닌 딱 100퍼센트. 그렇기에 나에게 세상이란 노력하지 않고선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정글 같은 곳이었다. 그래도 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는 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지만 마음 한켠엔 나도 모를 억울함이 잔존했다. 공부에 재능이 있어서 시간을 조금만 투자해도 좋은 성적을 받는다거나 찍은 문제마다 대박이 나는 사람. 그리고 순전히 추첨으로만 선발되는 시스템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 내 가족이어서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 나에게 복이 많다니.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내가 이 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나?'였다. 하지만 이건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결론지었다. 복을 누릴 자격 같은 건 없다. 그저 나는 이 순간, 복이 많은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복을 충분히 누리기로 했다. 복덩이가 그랬다. '복이 들어온다', '행운은 내 편이다'라는 생각을 해야 정말 그렇게 된다고. 그렇게 나도 복덩이가 되었다.
황우치해안과 바다와 맞닿아있던 돌길까지 구경하고 있자니 슬슬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전 3일은 차로만 편히 이동한 데다가 용머리해안이 돌길이어서 무리하게 걸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다리가 아프니 피로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책도 가져왔으니 근처 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 하고 책도 읽어야겠다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눈에 들어온 카페가 하나 있었는데 누가 봐도 관광지에 있을 법한 카페였다. 썩 좋아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선택지는 이것밖에 없었다.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이번에도 운 좋게 오션뷰인 4인석을 차지했다. 혼자여서 4인석을 쓰면 남들에게 피해가 될까 싶었지만 빈자리가 많아서 이렇게 써도 될 듯싶었다. 그리고 처음에 앉았던 자리는 콘센트가 없어서 핸드폰 충전을 못할까봐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바다가 더 잘 보이고 콘센트까지 있는 옆 테이블로 자리를 옮길 수 있어서 더 만족스러웠다. 커피맛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꽤 소란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책에는 금세 집중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완독했다.
책을 다 읽고 바다를 구경하고 있자니 슬슬 배가 고파왔다. 산방산 쪽은 버스가 자주 오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잘 맞춰야 했는데 어플을 확인하니 26분 뒤에 버스가 온다고 했다. 카페에서 정류장까지 걷는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 출발하는 게 좋을 듯하여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옆 테이블과 뒷 테이블에서 슬금슬금 내 자리로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내가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언덕을 걸어 정류장에 도착했다.
산방산으로 통하는 언덕이라 꽤나 길고 가파를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완만해서 편하게 올라왔다. 이 길도 잘 닦여있어서 더 편하게 오른 듯했다. 그리고 10분 정도 기다리니 버스가 도착했다. 우선 중문에서 점저를 먹을 생각이었다. 메뉴와 식당은 이미 정해두었다. 고사리육개장을 아직 못 먹어서 오늘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대부분 점심장사밖에 하지 않아서 이대로 오늘의 메뉴는 좌절되나 했다. 그렇지만 폭풍검색을 한 끝에 발견한 식당. 브레이크 타임도 없고 원하는 메뉴도 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식당으로 향해 고사리육개장을 맛보았다. 예전에 출장을 다닐 때 우진해장국을 좋아해서 종종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맛과는 사뭇 달랐다. 그렇지만 시원한 맛이 좋아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 고사리와 고기 양도 꽤나 넉넉해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도착했다.
오늘은 날도 좋았던 데다가 다시 나다운 여행에 집중할 수 있어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숙소 와서 다른 건 안 먹을 생각이었는데 어제 후배님에게 받은 동문 아베베 땅콩 빵 하나 먹은 건 안 비밀. 맛은 있는데 역시 나에겐 너무 달았다. 남은 하나는 꼭 아메리카노와 마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