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봄꽃이 피기 시작하면 마음부터 아팠다. 채 꽃이 피기 전부터 공중에 흩어지는 어떤 기운, 어떤 감, 어떤 분위기가 슬슬 슬픔을 몰고 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슬픔은 세월이 중첩되는 중에 학습된 슬픔일 것이다. 그리고 중첩돼 온 세월 속에서 슬픔도 중첩돼 왔다. 현실에 관심을 두거나 그렇지 않거나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의식 속에 자리 잡게 한 공통의 슬픔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다. 벚꽃이 가지 무겁게 피어 꽃잎을 흩날리고 겨우 내내 눈길 받았으나 잠시 밀려난 동백이 여전히 피고 지는 중에 곧 들이닥칠, 끔찍하고 잔인한 사월과 오월의 부서지는 햇살 속 슬픔에 대해, 한 슬픔이 잊히기 전에 다시 이야기하고, 다시 말하고 들여다볼 테다. 이 슬픔들은 마치 서로를 붙안고 지탱하는 듯하다. 마치 그렇지 않으면 다음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제발 잊지 말고 이 슬픔들을 오래오래 기록하고 기억하여 다시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이 슬픔을 반복하지 말라고 애원하는 듯하다.
지난해 이태원참사를 겪고 난 후 글을 쓰는 행동 자체가 내겐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쥐어짜 내어 글을 쓰고 나면 스스로를 염오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마음의 고통은 이내 신체화되어 자신을 괴롭혔다. 무섭게 아프던 시간이었다. 갱신되는 고통의 총량은 나이를 먹을수록 늘어만 갔다. 무엇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세상살이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끝이라는 것은 온다. 그 사이 벚꽃은 피고 피고 바람결에 꽃잎을 날렸다. 그리고 오래된 슬픔이 봄날의 수액처럼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은 4.3과 4.16과 4.19와 5.18이라는 지점들이다. 질기도록 팽팽하게 당겨진 이 역사의 날들은 오연하게 고통으로 일그러진 사람의 시간들을 가리키고 있다. 하나의 사건으로 뭉쳐져 있으나 낱낱으로 흩어진 별개의 사건으로 마치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 쏟아진다. 사람마다 다른 형태로 다른 언어로 다른 색으로 그리고 다른 눈빛으로 바라본다. 질문할 수 있다면 그 언어는 “왜?”로 함축될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내게 저 사건들은 늘 “왜?”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뒤에 따르는 말들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하필 왜 그런 방법이었는가.
축제 거리를 걸으며 꽃잎이 흩뿌려지는 공간을 흐르는 설렘들, 사람들의 작은 흥분을 공유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서 계절의 흐름에 맞춰 꽃놀이를 가고 단풍을 즐기고 다양한 행사 속에서 기쁨을 찾아낸다. 그것이 못내 다행스러우면서도 가슴 한 칸이 아팠다. 풍문처럼, 법적 기준 주 40시간 노동을 지나 52시간이란 헛소리를 맴돌더니 69시간이란 폭력적 발언이 지저분하게 나부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 속에서 먼저 간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그들은 다른 모습으로 사라져 갔지만 모두 폭압으로 인해 고통받았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아마도 이제는 이 재난의 형태가 조금은 더 일상화된 형태로 변형해서 스며들 듯하다. 적어도 예전에는 탄압에 맞선다는 명분이라도 선명했지만 지금 신자본주의 사회 내 각자도생의 현실에선 폭력이 법과 제도라는 형태로 개인의 성취와 탁월한 능력이라는 명제로 해사하게 포장해 있다. 우리는 저 숱한 고통의 역사를 기념하고 아파하기에도 힘들 만큼 현실을 매일매일 고난에 찌들어서 낼 이 선명한 일상.
폭압은 참으로 다채로워졌다.
이제 역사적 슬픔은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못내 아프다. 왜 그런 방법이었어야 했나 하는 질문은 하여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폭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폭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다양한 언어로 말해야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평화를 이야기하고 평화로운 일상과 평화로운 저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햇살 부신 봄날 내내 통곡이 끊이지 않는 역사가 가리키는 지점을 다시 바라본다. 그 사소한 평화를 지켜나가는 것부터 시작이라고, 그러니 이날들을 기리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일상의 평화를 굳건히 하는 거라고, 일상의 평화를 부수는 것들과 맞서서 의연하고 단단하게 서 있으라고, 저 꽃나무들처럼 꽃이 피고 지고 잎이 돋고 지는 시간 속에서도 지속하는 끈질김으로 지켜나가라고. 절망도 마침내 끝이 있다고. 거기에 비로소 무수한 대다수의, 작은 사람들이 누리는 위대하고 평범한 일상의 평화가 있다고.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