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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Oct 15. 2024

구원을 찾습니다

뉴스를 읽으면 매일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SNS를 훑어보면 매일 청원 글과 서명을 촉구하는 글이 쏟아진다.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해 사망한 딸의 엄마가 글을 올리고 이집트에서 망명을 요청하는 사연이 올라온다. 동물학대의 현실을 조명하고 환경파괴와 기후위기를 논한다. 무슬림 사원 건립이 무산된 현실을 드러내고 백신으로 여성의 몸에서만 특정 부작용이 있는지 밝혀내고 장애인들이 인권 투쟁을 위해 왜 소위 범법을 행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수많은 글을 읽다가 보면 이 사건들의 면면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바로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다.     


소수자라고 하면 생각 외로 많은 이들이 인구수 대비를 따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번역의 문제이다. 다수자의 반대편에 있는 소수자-사회적약자는 인구수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다. 다수자가 영어로 majority를, 소수자는 minority를 의미한다. main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소수자이다. 여성을 대상화함으로써 멸시와 숭배 등으로 대상화하는 ‘여성혐오(misogyny)’가 단순한 증오의 개념인 ‘여성 혐오’와 다른 것처럼, 소수자는 숫자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다.    

 

소수자는 권력에서 비켜나 있음으로 차별을 받는 집단 전체를 의미한다. 여성, 아동, 노인, 이주민, 장애인, 성소수자, 소수종교인, 노동자 그리고 이제는 비인간동물도 여기에 포함되고 있다. 권력에 비켜나 있음으로 인해 이들의 권리는 쉽게 미끄러져 내린다. 목소리를 내려해도 스피커가 되지 못하고 잘 들리지 않는다. 다수자가 자신들의 자리보전을 위해서나 자신들이 받는 혜택이 줄어드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할 노조를 귀족노조라 명명하여 노동자를 와해시키려 하고 인간이 많이 먹을 권리를 내세워 공장식 축산의 생명 훼손을 눈감으려 한다. 모든 무슬림이 테러 분자가 아님에도 다수자의 힘으로 종교의 자유를 꺾어버린다. 출생률이 낮은 것을 국가적 위기라 말하면서 임산부 배려석을 못 마땅히 여기고 여전히 여성의 취업 시 결혼 여부부터 질문한다. 사용자라면, 인간이라면, 기독교인이라면, 남성이라면 받지 않을 차별이다.     


비가 많이 내리면 혹은 볕이 너무 뜨거우면,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면, 폭설이 내리면 자신의 몸 하나 챙기기 힘든 하우스리스를 떠올린다. 하우스리스(houseless)라는 말은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처음 들었다. 흔히 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홈리스(homeless)라 부르는데 영화에서 주인공은 당당하게 말한다. “I'm not a homeless. I'm just houseless. (나는 가정이 없지 않아요. 단지 집이 없을 뿐이죠.)” 집이 없다고 가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서 길 생활을 하는 이들을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말이다. 길고양이들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너무나 인간적이라 살아내기 힘든 환경 속에서도 가족을 만들고 생존해 나가는 것처럼 인간들도 때로는 사회 구조적 문제로, 때로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로 길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사회 경제적 횡포로 내몰려서, 가정폭력으로 인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라면 다른 문제가 된다. 그리고 길 생활이 또 다른 폭력적 현실에 노출된다면 이것도 다른 문제가 된다.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그 상황에 강압도 공포도 스며들 수 없어야지만 그것은 ‘선택’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요즘 내내 붙잡고 있는 화두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마가복음 19:14)”

가끔 수많은 소수자가 외압에 굴하여 멍든 얼굴을 할 때, 성경의 글귀의 ‘어린아이’에 또 다른 소수자들을 하나, 하나 넣어본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거하는 곳이 천국이라면, 이 세상에서 서로 구원해야 할 존재들은 서로가 아닐까 하고 소수자들이 모이는 것을 금하는 이곳은 구원을 막아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더듬는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한때 드라마 폐인을 양산했던 MBC 드라마 《다모》의 대사다. 사회적 횡포에 맞서서 소수자들이 연대하고 다른 층위와 면면을 가진 이들이 서로의 고통을 어루만질 때 구원은, 아니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은 각자의 생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여러 가지 이유로 외롭고 아픈, 알고 보면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수자들의 쓰라린 일상의 빛나는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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