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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우 Jul 28. 2021

석사 동기와 논문을 쓰다: 2018년

이 글은 전상현, 이정우, 2018, "베트남과 필리핀의 대중국 전략 비교연구: 남중국해 해양 분쟁에 대한 대응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연구, 28(4), pp.31-76을 쓰게 된 과정과 구상을 담고 있습니다.


대회에 출전하자고?


  같은 2017년에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한 친구가 있다. 글도 잘 읽고 똑똑했다. 같이 술도 자주 마시고 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안부를 서로 물으며 이야기하다가 그 친구는 나에게 혹시 대회를 나갈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생각보다 큰 돈을 상금으로 내세우는 논문 대회가 많다는 것이 친구의 요지였다. 좋은 대회가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처음엔 사실 그렇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 대회가 있으면 혼자 나가도 될텐데 굳이 나를 끼고 나가서 상금을 반으로 나누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관심을 끊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친구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한국해양재단에서 하는 논문대회였다. 인터넷 공고문도 보내주고 면밀히 읽어봤다. 오, 가장 높은 상이 장관상이라고? 솔깃했다. 이왕 논문을 쓰는 거면 그래! 큰 상금도 받을 수 있고, 큰 상을 탈 수 있는 논문을 써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리고 이렇게 받는 것이라면 나의 이력에 적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만약 타지 못하더라도 좋은 경험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연구 주제를 정해서 같이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고려대학교 정대후문의 어느 카페에서 만나서 주제를 이것저것 이야기하는데, 처음엔 서로 재밌어보이는 것이 없었다. 사실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연구 주제를 못 찾겠어서 논문 대회는 아무래도 못 나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 어떤 연구를 할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국제정치 전공이고, 나는 비교정치 전공이다. 비교정치는 대부분 국내 정치적 요인을 연구하고 국제정치는 말 그대로 국내가 아닌 국가 간의 정치를 연구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 주제를 정할 수 있을까?


  어느 날, 그 친구가 나에게 자신이 읽고 있는 논문을 알려줬다. 저명한 국제정치이론가 중에 랜달 슈웰러(Rendall Schweller)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underbalancing이라는 개념이었다. Underbalancing은 한국어로 "과소균형"이라 해석하는데, 이는 어느 국가가 다른 강한 국가를 대할 때 균형정책을 취해야하지만 여러 요인으로 인해 그러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Schweller, 2004). 이론의 틀이 있어도 사례가 없으면 말짱 꽝이 아닌가. 대체 무엇을 과소균형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때 나는 외교정책론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 당시에 동남아시아 국가의 위험 회피 전략(Hedging)을 다루고 있었는데, 이걸 같이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베트남과 필리핀은 부상하는 강대국 중국을 대응하는 전략에 있어 대부분의 학자들은 중국의 편도 아니고, 미국의 편도 아니라는, 즉 위험을 회피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고 보았다. (자세한 기존 연구 검토는 본 논문을 참조하라.) 그런데 여기서 잘 생각해보면, 중국이라는 잠재적인 위협은 가까이에 있다. 그러면 미국이라는 멀리 있는 강한 국가를 데려와서 균형 전략을 취하면 괜찮을텐데 왜 그러지 못할까? 이것이야말로 균형을 취하지 못하는 "과소균형"의 사례가 아닐까?


  사실 과소균형이라는 개념을 친구가 처음 가져왔을 때는 반감이 들었다. 당시 친구는 랜달 슈웰러에 빠져있다고 했다. 네가 랜달 슈웰러의 팬인 것은 알겠으나 베트남과 필리핀 두 사례를 같은 과소 균형으로 본다고? 어느 날은 이제 논문의 분석틀을 최종적으로 확정을 짓자고 일요일에 대학원 총학생회실에 모였다. 당시 나는 대학원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었을 때였다. 나는 두 사례를 비교해보면 너무나 명확히 다른데 어떻게 같은 형태의 과소 균형일 수 있냐고 묻고 또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살짝 짜증을 냈던 것 같다. 미안하다. 사실, 친구가 먼저 나에게 "오늘 있는 토론에서 부딪히더라도 서로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 서로 이해하도록 하자"라고 말해줬다. 고맙다.


  내가 둘을 같은 과소 균형으로 볼 수 없다고 한 지점의 요지는 분명했다. 필리핀은 외교정책의 결정권자가 사실상 외교부장관이라기보다는 대통령 혼자이고, 베트남은 정부 내부에서 견제할 수 있는 반대를 행사권자가 많았다. 이 점을 이야기하자 정적이 돌았다. 친구를 설득할 말이 더 필요했다. 혼자서 결정하는 외교정책이던지, 여럿이 정하는 외교정책이던지 과소균형인게 같은 거 아니냐는 친구의 논리도 설득했어야 했다. 거기서 내가 꺼낸 논리는 바로 "혼자 정하면 결국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서 맘대로 결정되고, 둘 이상이 되면 사공이 많기 때문에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친구가 나에게 좀 양보를 해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논문의 가설은 외교정책에 반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행위자가 몇 명이나 있냐가 각각 다른 형태의 과소균형을 가져온다는 것으로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해양수산부 장관상을 수상하다.


  논문 틀이 정해지니까 완성하는 것은 사실 시간 문제였다. 그때 한 달인가 두 달 정도 기한이 남아있었을까. 한 달 정도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번개에 콩 구워먹듯이 논문을 완성했다. 논문 쓰기에 걸림돌이 되는 문제는 내 문장력이었다. 베트남의 사례는 친구가, 필리핀은 내가 적기로 했다. 필리핀 사례의 경우, 대통령의 개인적인 판단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1차 자료가 적기도 했지만, 문장을 적다보니 나의 문장 구성력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친구의 문장은 근거를 바탕으로 주장이 명확하고 짜임새가 있었던 반면에, 나는 그러지 못했다. 문장이 모두 모호하고 유보하는 어투였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이것에 가깝다"는 투다.


  서류 심사 예선에 통과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제 본선 발표가 남았으니 그때부터 원고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심사위원 분들이 본선에서 우리에게 했던 질문 중 하나도 이것이다. "베트남 사례의 경우, 명확한 문장들로 되어있는데, 필리핀 사례는 추측의 문장들이 많다. 이유가 있나?" 지금 생각하면 친구에게 많이 미안하다. 미진한 문장들이 그런 질문을 가져왔다. 좀 더 분명한 의미를 담아서 강한 어조의 문장을 적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발표를 준비하는 중간중간에 친구가 원고를 살펴보다가, "이게 무슨 뜻이냐", "이 문장 무슨 말인지 정말 못 알아듣겠다"는 말을 자주 해줬다. 그리고 내 문장을 아예 바꿔서 다르게 보냈다. 처음엔 이런 행동에 자존심이 살짝 상했다. 나도 그래도 공부하는 사람이고 같이 논리를 만들어 가고 있는데,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고? 그런데, 그런 생각은 그때 뿐이었다. 그러고 다음 날이면 이 친구가 정말 나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이 때의 과정은 정말 이 다음 논문을 쓸 때, 그리고 지금 논문을 쓰고 있는 순간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내가 나의 글을 읽어도 논리가 분명하게 보이는 글을 쓰는 것은 중요하다.


  같이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하고 서로 마음에 드는 결과가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대망의 시상식 날, 왜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이 이제까지 있었던 대회 중에 가장 기분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노력도 많이 했지만 심사위원들도 우리가 했던 대답에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장려상, 우수상의 결과가 나왔는데, 우리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최우수상일 것인가? 아니겠지. 살짝 기대 반, 체념 반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최우수상에서 우리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친구와 일어나면서 악수를 세게 했다. 그때의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학술지에 투고하자. 응?


  한국해양재단에서 논문집이 발간되기는 했지만 요약만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했을 때 수정할 점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당시에 나는 한국동남아연구소의 대학원생 연구회원모임 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동남아학회의 학술지인 "동남아시아연구"지에 투고하고 싶었다. 한국해양재단에 이메일을 보내어 다른 학술지에 투고를 해도 되냐고 물었고, 동남아시아연구 측에도 투고 신청 가능 여부를 물었다. 두 곳에서 전부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고 나는 투고를 준비하고 싶었다. 이미 나는 다 준비를 해서 다시 달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친구가 갑자기 부정적인 반응을 내놨다. 친구는 당시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요즘 공부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생겼다는 것이다. 자신감도 사라지고 풀이 죽었다. 무엇보다 친구는 지도교수님을 너무 무서워했다. 이봐, 나는 너를 선생님으로 생각하고 이제까지 잘 왔는데, 네가 이런 모습을 보이면 어떡해. 내가 너무 속상하잖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 공부를 포기한다고? 사실 배신감보다는 친구의 마음을 너무 알 것 같아서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혹시 그 친구가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하고 싶은 말은, 너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속상함에 한참을 생각하다가 친구에게 무리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필리핀 사례라도 분리해서 투고를 준비하겠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친구가 기다리라고 했다. 이왕 하는거 이 논문을 같이 완성하면 좋겠다고 말해줬다.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주 많은 생각을 했겠지. 자신의 떨어져가는 자신감을 붙잡고 그런 판단을 해줬을텐데. 너무나도 고맙다.


  제목도 좀 더 구체적으로 바꾸고, 내용을 좀 더 덧댔다. 나는 필리핀에 대해서 신문기사를 모조리 수집하고 논문을 좀 더 찾아봤다.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필리핀에서 쓰인 논문을 구하기 위해 저자들에게 직접 이메일도 많이 보냈다. 다행히도 해외 저자들은 바로 논문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이때도 우리 공저자님은 나에게 문장을 이렇게 쓰자, 저렇게 쓰자는 말을 많이 해줬다. 이때 고칠 때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좋은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원고를 완성하고 투고를 하던 날이 되었고 우리는 동료 심사 결과를 기다리게 되었다.


동료 심사 이후


  동료 심사 결과, 수정 후 게재가 나왔다. 익명 심사자 분들의 날카롭고 훌륭한 지적에 지금도 감사드린다. 그렇게 공저자님과 나는 논문을 완성했고, 출간된 완성본을 받아보았다. 나는 출간된 완성본의 별쇄본을 많이 주문했다. 학과 교수님들에게도 드리면서 인사도 드릴 겸이었다. 친구는 필요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출간되고 난 다음에 하나만 주면 안되냐고 나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하나를 줬는데, 사실 다 가져가도 상관없었다. 이 논문의 출간은 사실 다 공저자님의 덕이다. 이번에도 좋은 친구를 만나 좋은 기회에 좋은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이후, 친구는 석사를 졸업하면서 공부를 그만 뒀다. 유학 준비가 좌절된 것도 있었고 자신이 공부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나에게 말했다. 함께 술을 마시던 날, 갑자기 취업을 준비한다며 우울하다고 했다. 나는 사실 네가 취업을 준비하는 것도 힘들겠다고 생각했지만 좋은 선생님이었던 네가 공부를 그만둔다는 사실이 좀 더 섭섭하기는 했다. 공저자님, 너는 워낙 능력있는 사람이니까 취업은 금방 할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나에게 가르쳐준만큼 더 열심히 공부해서 나는 학계에 끝까지 살아남아있겠다.


  최근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를 통해서 확인한 사실인데, 우리 논문을 인용한 횟수가 3회가 되었다. 물론, 기존연구검토를 하면서 모두 인용한 것이다. 그래도 당시에 시의적절한 논문을 좋은 때에 잘 썼구나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인용을 한 번씩 확인할 때마다 친구에게, "공저자님, 우리 논문을 누군가가 인용을 했어! 나 요즘도 계속 들어가서 확인해보잖아."라고 이야기하면서 연락할 빌미가 생기니까 더 좋고.


<참고 문헌>

Schweller, Rendall, 2004, "Unanswered Threats: A Neoclassical Realist Theory of Underbalancing", International Security, 29(2), pp.159-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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