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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우 Jul 28. 2021

학력에 대한 자격지심

그것을 떨치기 위해 노력한 나의 20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나는 춘천에 위치한 국립 강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강원대로 입학하게 된 계기가 중요하겠지. 사실 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과학과 수학은 거의 0점에 가까운 점수를 보였다. 글쎄, 나에게 있는 것은 '착한 마음' 정도? 왜냐하면, 나는 공부는 못했지만 다행히도 일탈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고 순진함의 대명사였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상담하던 날,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수업 태도도 나쁘지 않은데 왜 이렇게 성적이 낮은지 모르겠네? 이유를 잘 생각해봐.


  내가 원했던 것은 사실 나의 공부에 대한 관심이었을까? 이제까지 내가 못하면 혼내는 사람은 있었어도 잘하기 위해 방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당시에 담임 선생님께도 많은 것을 여쭙고, 선생님을 모두 찾아다니며 상담을 받고 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모두들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에 전교 1등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하지만, 나는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내가 가장 잘 한 성적은 전교 26등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게 중학교 3학년 때, 선생님들의 격려로 얻어낸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렇게 공부하겠다고 늘 독서실까지 차로 태워준다고 고생한 우리 엄마 덕도 있고. 부족하지 않은 집안 살림으로 뒷받침해주신 우리 아빠 덕도 있고.


고등학교에서의 좌절과 기회


  고등학교 입시 원서를 쓰던 날. 담임 선생님은 고입 시험을 잘 쳐야 한다고 하시며 생각보다 낮은 내신 점수에도 그 도시에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에 원서를 넣어주셨다. 정말 턱걸이였다. 고입 시험을 칠 때까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들어 간 고등학교. 고등학교에선 공부를 좇아가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게 생긴 부족한 기본기로 공부를 따라가는 게 힘들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신 200점 만점에 180점 이상 애들이 보통 모여있는 학교에서 모든 것을 비교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논술반이라는 것을 만든다고 이야기해주셨다. 책을 같이 읽고 토론도 한다는 것이다.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공부보다는 논술반이 전부였다. 요약하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내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전혀 몰랐지만 나름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계기였다. 그때 읽었던 책이 페르난도 사바테르의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정치학", 당시에 핫한 "나쁜 사마리아인들", "촌놈들의 제국주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읽고 하나씩 토론하면서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굳이 외우지 않아도 책에 나오는 내용을 정리해서 다른 사람들과 어떤 의미인지 토론하는 것. 얼마나 멋진 일이었나. 당시에 홀로 자본론도 읽고 여러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덕분에 지금 공부에 도움이 얼마나 되는지.


  수능 때까지 그래서 나는 공부를. 지금 와서 이야기하지만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고, 버티면서 공부한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수능 이후에 학원 강사 알바를 하면서 기다리다가 성적에 맞는, 그리고 관심이 있었던 정치외교학과를 지원했다. 그게 강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다. 사실 최초 합격도 아니고 1차 추가 합격이었다. 예비 1번이었거든. 가군과 나군은 뭐, 예비 번호 100번대에서 떨어졌다.


대학의 이름과 자격지심


  요즘 누가 학교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나! 학과에서 열심히 하면 될 것이지! 이런 생각으로 학교를 다녔다. 좋은 친구들도 사귀고, 존경하는 선생님들도 여기에 계시고. 그런데 왜 자꾸 나에게는 자격지심이 생길까. 자격지심의 이유는 바로 내가 학교 바깥으로 자꾸 싸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사실 모르고 가만히 있는 게 더 나았을 수 있다. 차라리 편입을 준비하던지, 부족했던 자신을 탓하던지. 나는 나를 포장하러 다녔다.


  2010년에는 외교부 전국 모의유엔회의, 육군사관학교 안보 토론대회, 2011년에는 Global Classroom, 군대를 제대한 다음에는 고려대학교 모의유엔회의를 참가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강원대학교에서도 전국 규모의 대회를 만들겠다며 총학생회를 설득해서 강원대학교 전국 모의유엔회의를 개최했다. 대회에 다니면서 느낀 것은 바로 나의 영어 실력이 부족하지 않으니, 조금만 하면 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의 학교 이름, 강원대학교를 말하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 대회를 그렇게 다니면서 나 홀로 다른 소위 "좋은"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을 질투하고 시기했다. 나는 치졸했다.


  나는 시험 보는 능력도 없고, 머리가 사실 좋지 않다. 편입 공부하는 것도 너무 싫었다. 어머니가 편입을 보라고 해서 준비는 해서 억지로 응시한 적은 있다. 모두 다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일본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에 지원해서 유학을 갔다. 일본어를 몰라도 영어만 알면 일본 정부에서 일정기간 동안 생활비를 준다고 해서 지원했다. 물론 정말 될 줄 몰랐지만. 그리고 거기서 수행한 독립 연구 결과로 프라하 카렐대학교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일본 국립 나가사키대학의 연구 지도교수의 덕이다. 정말 감사하다. 그때부터 느꼈다. 내가 정말 공부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2014년과 2015년이 지나갔다.


  강원대학교에서 석사를 해야 하나, 아니면 다른 학교로 가야 하나 고민이 깊어지던 무렵. 2016년이었다. 당시에 가장 존경하는 정치학자 중 한 분으로 꼽는 P교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은퇴하시고 이제 사무실 정리 마지막 날, 나는 책 정리를 도와드리고 사모님께서 학교로 차를 끌고 오셨을 때 마지막 짐 꾸러미를 차에 실어드렸었다. 빈 사무실에서 잠시 기다리는데, 나는 용기를 갖고 선생님께 여쭸다. "교수님, 혹시 여기 강원대에서 석사를 계속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다른 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러자 교수님께서는 나를 한참 바라보시더니 일어나시고 입을 떼셨다.


이정우 군, 자네는 공부를 할 것이잖아? 박사까지 생각이 있는 거지? 무릇 공부라는 것은 경쟁할만한 나의 또래가 있는 곳에서 해야 해. 그렇게 경쟁을 해봐도 내가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면, 앞으로 계속 공부를 해.


   물론 당시에 공부하고 싶었던 분야가 P 교수님과 겹치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내가 지도교수로 삼고 싶은 다른 분이 강원대학교에 계셨지만, 나는 이 말 한마디에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석사과정에 입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 지도교수가 나의 인생을 모두 책임지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경쟁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확인해야 해. 이런 마음을 먹고 학교를 살펴봤다. 당시에 내가 하고 싶던 공부는 미군정 시기의 한국사였다. 정치학과에서 이런 공부를 하고 싶다니 이상하겠지만, 역사를 중심으로 한 방법론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연구 주제란 지도교수의 영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인데 굳이 지원할 학교에 제한을 둘 필요가 있나 싶었다. 여러 학교를 냈지만, 고려대학교에 등록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당시 2017년을 기준으로 세계 50위 안에 든 정치학과였고, 유명한 교수들도 많았으니까. 특히, 석사과정 면접이 인상적이었다.


석사과정에 입학하다


  2016년 말이었다. 나는 양복을 입고 긴장하며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어떤 교수님들께서 들어오셨는지 기억에 생생하다. 나의 전공인 비교정치 분야에서는 J 교수님께서 심사위원으로 들어오셨다. J 교수님의 수업을 들어본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생이라면 알겠지만, 굉장히 질문이 날카롭고 핵심을 찌르는 점이 인상적인 분이다. 평상시엔 따뜻하지만 가끔은 무서운 분이다. 같이 들어간 다른 친구들은 관심 있는 분야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국제정치, " "비교정치"와 같이 세부 공을 말했지만, 나는 그냥 연구 질문을 말했다. 당시에 적은 연구 질문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미국이 미친 영향"이었다.


  J 선생님께서는 나를 정말 무섭게 쳐다보셨다. 그러더니 "민주화에 대한 이론을 설명해보세요"라고 하셨다. 당시 나는 Jan Teorell이라는 학자의 분류를 외워갔고, 그 사람을 인용한다고 말하면서 네 가지 정도가 있다고 했다. 하나씩 세부적으로 설명하려던 찰나에, "아, 그만. 그럼 그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이 뭐라고 생각해요?" 순간 말이 끊겨서 나는 정말 당황했다. 나를 쳐다보는 교수님의 눈이 정말 무서웠다. 그때 나는 "어떤 이론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론은 이런 설명을 하는데, 그 인과 관계의 화살표를 반대로 돌려서 이런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변을 했다. J 선생님께서는 해당 이론의 유명한 저서 제목에 대해 언급하시고 나에게 그것을 아냐고 물어보셨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평가하시는 종이에 무엇을 적으셨다. 아래를 쳐다보시고 가만히 계셨다. 1분 정도 정적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이 질문을 듣는 순간 당황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없습니다"라고 답했더니 바로 다음 사람으로 질문이 넘어갔다. 나는 떨어진 줄 알았다. 따로 컨택을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런 이론을 아느냐고 적어도 세 가지는 물어보던데. 왜 나에게는 답을 다 듣지도 않고 그러는 건가. 역시 나는 안 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그다음 주, 고려대학교에 합격했다. 아마 우리 외할머니께서 손자를 많이 도와주시지 않았을까 싶고, 나에게 운이 많았던 것 같다. 다른 것을 물어보지 않고 이렇게 이론만으로 붙을 수 있는 곳이면 정말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합격한 동기 수도 정말 많았다. 이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내가 살아남을 것을 생각하니 막막하기도 했지만, 또 P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시험해볼 수 있는 때인 것 같았다.


석사과정에서도 계속되는 자격지심


  그런데 문제는 가끔 가는 술자리였다. 아주 고학번의 대학원 선배를 만나면 꼭 묻는 질문이 "학부는 어디 출신이야?"였다. 교수님들도 가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움츠러들었다. 나의 업보인 것 같았다. 그래, 이런 학교에 입학했다고 해서 나의 과거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 그래, 그냥 사람들 앞에서는 웃으면서 넘기고, 그냥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격지심이 있으니까 태도가 달라지는 게 있었다. 도전하는 게 무섭지 않았다. 일단 해보면 되는 거니까.


  2017년, 2018년, 2019년에 논문을 한 편씩 어쩌다 보니 학술지에 투고를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논문 한 편씩 쓰게 된 계기와 투고하는 과정을 추후에 글로 길게 담아보고자 한다. 하나씩 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나를 피곤함에 몰아넣었고 아무렇지 않게 나를 몰아세웠다. 그렇게 실적을 만들고 독립적인 학자로 나를 만들어놓으면 저절로 졸업을 할 테고 나는 엄청난 학자가 되어 있겠지.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있지도 않은 미래를 그리면서, 이뤄질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살았다.


  졸업도 한 번 밀리고, 유학 준비도 어쩌다 보니 밀려서 2019년이 지났고 2020년이 되었다. 2020년에 와서 논문을 쓰고 졸업을 하다 보니, 이제 힘들게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것도 싫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몸도 망가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랑 사귄다고 마신 술은 지방간으로, 갑상선에선 결절이, 오래 앉아있으니까 척추가 망가졌다. 콜레스테롤 수치도 생각보다 높다고 했다. 어느 날 왼쪽 눈에 초점이 잘 안 잡혀서 안과엘 갔더니 노안을 조심하라고 했다. 이석증이 생겨서 논문자격을 위한 종합시험을 보러 가지 못한 적도 있다. 무슨 일일까.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일하고 공부했을까.


  몸이 망가지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망가진 것이 있었다. 졸업이 밀릴 때, 미국으로 연구년을 간 교수에게서 "너는 졸업하고 뭘 할 예정인데?"라는 질문을 받았다. 할 일이 사실은 없었다. 그런데 난 그냥 졸업을 하고 이 대학원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당분간 좀 쉬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고 그러고 싶었다. 교수에게서 돌아온 답장은 "졸업을 그러면 여유롭게 해도 되는 거잖아. 그럼 다음 학기에 논문을 쓰렴"이라고 돌아온 메일을 보며 나는 절망했고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학내에서 조교를 하고 있었고, 그만두고 싶어도 나를 놔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제 대학원생으로 들어오는 학생의 수가 많지 않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는 그곳에서 일을 참 오래 했다. 부탁만 하면 나는 금방 학술대회를 열 수 있었다. 현수막도 금방 하고 학술대회에 포스터도 주문을 넣으며 근방에서 도시락 주문도 다 하는 그런 허드렛일. 나는 그만두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권위에 눌리는 내가 싫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생각하는 지도교수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었다. 글쎄, 나를 억지로 졸업시키지 않을 의도가 없었을 것이라 믿지만! 나는 힘들었으니까. 나를 위해서 더 나쁜 사람이라 생각했다. 결국 나는 체념하고 2019년 동안, 1년을 더 일했다. 그리고 졸업 논문을 쓸 때가 되어서 연구년에서 돌아온 지도교수님에게 취업을 할 것이라고 했다. 교수님은 취업을 한다고 하니 졸업을 하자고 했다. 그러한 마음 상태에서 석사학위 청구논문을 쓰게 되었다. 그런 인간관계 속에서, 이미 다 상해버린 마음으로. 그렇게 논문을 완성했고 나는 석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2020년 8월이었다.


졸업 이후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사진을 찍으러 무서워서 학교도 가지 못했다. 석사 가운은 입어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몸이 망가지고 마음이 망가지니까 학교는 돌아보기 싫었다. 그렇게 나는 취직을 했고 어느 외국인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대학원 바깥에서 일을 하는 동안, 아주 미련하게도 공부에 미련이 생겼다. 석사학위논문을 영어로 바꿔서 해외 저널에 투고하는 시도를 계속했다. 역시 해외 저널은 쉽지 않았다. 이 논문은 아직도 붙잡고 해외 저널에 투고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금 벌써 3번째 투고 거절을 당했다.


  어느 날, 그러다 2021년 초, 석사 지도교수에서 전화가 왔다. 혹시 어느 대학에서 학부생들 논문 작성을 지도하는 수업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논문 쓰기를 가르쳤고, 그렇게 적는 학생들을 보면서 나도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같은 고려대에서 박사과정을 하기로 결정을 했고, 나는 그렇게 경쟁을 뚫고 단독 합격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글쎄, 이게 자랑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미련하게도 다시 대학원행을 결정했다. 나에게 과연 어떤 미래가 열리게 될 것인지.


  원래 기억은 미화하라고 있는 것인가. 석사 지도교수는 개인적으로 만나면 좋은 사람이다. 얼마 전에도 같이 밥 먹었는데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다. 졸업하는 과정에선 너무나 미웠지만 지금은 좋은 사이로 잘 지내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지도교수도 정말 아무 의도없이 졸업을 천천히 하자고 말했던 것 같다. 나는 그 말에 크게 토를 달 수 없었던 것도 있었고 말이다. 내 마음이 괴로우니까 누군가를 밉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 그 당시의 나는 즐길 수 없었다. 서른이었고 마음이 불안했으니까. 다 지나가고 보니까 그런 것이다. 이렇게 나도 꼰대가 되기는 싫다. 맞다. 아마 박사과정을 하면서 또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나는 힘들어 할 것이다.


그렇게 다시 자격지심으로


  내 몸이 망가지기 이전까지는 자격지심이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나를 어떻게 하면 더 돋보이게 만들 것인가? 이런 점이 사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욕심은 커지면 채우기 어렵고, 채워도 공허함을 느끼는 법. 아무리 논문을 세 편을 써도 모자라 보이면 모자란 것이다. 그 와중에 다른 동기들은 모두 미국으로 박사 유학을 갔다. 나는 이런 생활을 하면서 졸업도 못 하는데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다 보니 그저 내가 겪으면서 일궈낸 것들이 모두 의미 없이 보였다. 사실 석사 진학을 너무 후회했다.


  졸업을 하고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의 목표는 무엇인가? 과연 엄청난 실적의 학자인가? 모두가 존경하는 논문을 쓰는 사람? 이제 나에게 그런 능력은 남아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잡은 목표는 내가 쓸 수 있는 논문을 쓰면서, 나에게 떳떳한 학자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쓸 수 있는 논문을 쓰는 것. 그러면 내 몸이 망가지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노력은 하지만 이것도 모두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늘도 보고 꽃도 보면서.


  이렇게 생각을 하니 20대에 가졌던 나의 자격지심에 고마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나에게는 강원대학교라는 이름의 꼬리표가 붙어있고, 사람들은 학부를 어디 졸업했냐고 묻는다. 이제 이건 내가 안고 가야 하는 영원한 이름표이기 때문에 감당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제는 그냥 "아, 저 강원대학교 졸업했어요"라고 말한다.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앞으로 어떤 논문을 쓸까 고민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글쎄, 체념 일지. 아니면 그냥 순응 일지. 그것은 또 미래가 말해주겠지. 생각보다 나의 미래가 기대되면서도 무서운 이유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정말 무섭게도 나의 20대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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