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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윤 Jul 26. 2020

같은 주제 다른 엘리베이터

누구한테 책임을 묻고 있는 걸까.

집이 아닌 공간에서 자다 일어난 기분을 한 글자로 표현하자면? 와.


일반적인 범주 안에서 층간소음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웬만한 행동들은 다 취해봤으나 나아지기는커녕 더 거대하고 다양한 소음들이 우리 집을 가득 채울 때, 수정과 수정을 거듭한 진심 어린 쪽지가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때, 이른 아침 출근 전부터 남의 발소리에 깨고 최대한 늦게 집으로 돌아와도 그 소음이 멈추지 않을 때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너무나 복합적이었다. 그 감정들을 꺼낼 수 있었다면 아마 시꺼먼 색이었을 것이다.


주말 출근을 하지 않고 평일에 해도 되는데, 평소에도 늦게 가서 굳이 주말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데 주말 출근이라는 명목으로 주말에 본가로 가신다는 직장 동료분께 양해를 구했다. 감사하게도 허락해주셨다.


편하게 있으라고 말씀해주셨으나 남의 집인데 어떻게 그렇게 있을 수가. 매트리스를 반으로 나눠 최대한 바깥쪽에 일자로 누웠다. 오랜만에 알람도 껐다. 고요 속에서 자다가 눈이 떠졌다. 눈 뜨자마자 내뱉은 말은 "와"였다. 전쟁통에 있는 것처럼 매일 긴장 속에서 자고 두근두근두근 대면서 일어났는데 이렇게 고요한 순간에 저절로 눈이 떠지다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태양빛이 너무 아름다웠다. 매체에서 상쾌한 아침을 표현할 때 흔히 창문을 통해 쨍하게 들어오는 햇볕을 보여주고는 하던데 마치 그 장면에 내가 들어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전 7시쯤 일어났다. 출근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직장까지 거리가 꽤 있어서 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올 정도로 걸어야 했다. 그래도 좋았다. 새벽에 출근해 최대한 늦게까지 직장에 있다가 날짜가 바뀔 즈음에 집으로 들어갔을까. 이 평화로움이 행복했다. (물론 그 집과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도 사람 사는 공간이고 여러 여건상 소음들이 있으나 이건 나중에 적을 것이다.) 어쨌든 그랬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가고 다시 돌아올 때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어있는 공고문을 봤다. 아마 관리사무소에서 붙였을 것이다. 층간소음과 관련된 문구를 A4 용지에 프린트한 내용이었다. 내가 사는 곳 엘리베이터에도 층간 소음과 관련된 문구가 붙여져 있어서 그렇구나, 하고 넘기려고 했는데 그려진 캐릭터들이 눈길을 끌었다. 캐릭터들이 뭐라뭐라 말하고 있었다. 말풍선에 쓰인 말들은 대략 이랬다. 



늦은 시간 세탁기를 돌리면 세탁기가 싫어해요, 피아노나 악기 연주는 몇 시까지 해주세요, 가구를 세게 끌면 가구가 아파해요, 문은 살살 닫아주세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는 이렇게 쓰인 공고문이 붙어 있다.



층간소음이 발생하면 윗집으로 단정 짓고 화내지 말고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세요.



같은 주제지만 누구를 향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확연히 차이가 난다. 말풍선에 쓰인 문장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이게 맞는 건데 우리 아파트에 붙어있는 공고문은 누구한테 책임을 묻고 있는 걸까. 누구한테 배려를 강요하는 걸까. 누구한테? 도대체 누구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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