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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하민 May 09. 2021

종종 꾸준히 달리다가 결국

제주도에서 하프 마라톤 (1/2)

두 달 동안 매일은 아니어도 꾸준히 달리면서 자연스레 목표 같은 게 생겼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이다. 코로나 시국이라 옹기종기 모여 다 같이 출발하는 축제 분위기의 대회에는 당연히 참가할 수 없다. 그래도 동아일보 마라톤(서울 마라톤)은 비대면으로나마 열린다고 했다. 5월 1일부터 9일까지 원하는 코스를 달리고 기록을 올리면 메달을 보내주는 방식이다. 한 번도 12km 이상을 달려본 적 없는 초심자가 무턱대고 풀코스를 뛰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하프를 뛰기로 했다. 그럼 어느 코스로 뛸까. 문득 제주도가 떠올랐다. 이국적인 야자수와 옥빛 바다를 배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자. 그리고 간 김에 충분히 쉬면서 기분 전환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대회 날짜에 맞춰 비행기 티켓과 숙소를 구했다.


그렇게 일정을 정하고 나니 설렘과 함께 약간의 긴장이 찾아왔다. 달리기에 임하는 마음가짐이랄까, 태도가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사실 그동안은 기분 내키는 대로 했다. 보통은 천천히 뛰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을 때에는 화풀이라도 하듯 질주하면서 힘을 다 빼고 나머지를 걷다시피 했다. 이제 조금은 체계적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덜 고통스럽게 원하는 기록을 낼 수 있을 것이다. 21km 2시간 주파를 도전적인 목표로, 걷지 않고 완주하기를 필수 목표로 삼고 남은 2주 간의 훈련 계획을 짰다. 거의 매일 달리기로 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바빠지는 바람에 일주일에 3일 정도밖에 뛸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마저도 빠듯해서, 호수를 한 두 바퀴 돌고 나면 자정이 넘었다. 그래도 비행기를 타기 전날에 15km를 천천히 뛸 수 있었다. 야근을 하고 달리기에 적합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꼭 필요한 훈련이었다. 내 다리에게도, 머리에게도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경고라니. 누가 보면 울트라 마라톤이라도 뛰는 줄 알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21km는 나에게 버거운 거리다.)


숙소 근처의 오솔길


그리고 마침내 제주도.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난 뒤에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해변가를 천천히 달렸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바람은 제법 불길하게 불었다. 내가 묵는 곳은 금능해수욕장 근처였는데, 근방으로 난 오솔길에 가로등이 많지 않아서 어떤 구간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 캠핑을 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마지막 훈련을 마치고, 다음날은 종일 관광하는 일정으로 잡았다. 운이 좋게도 같은 시기에 근처로 놀러 온 친구가 둘이나 있어 일정을 함께 했다. 이전 회사 동기인 Y와 카이로스에서 브런치를 먹고 근처에 있는 항몽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목적지보다 가는 길이 훨씬 좋았다. 저녁에는 아버지 환갑을 기념하며 가족과 함께 온 J를 잠깐 만났다. 둘 다 몇 년 만에 보았지만 어색하지 않고 즐거웠다.


그리고 대회가 시작하는 토요일이 되었다. 아침에 뛸까도 하였으나 휴가 중의 늦잠을 포기하기는 싫었다. 오후에는 제주 현대미술관을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어서야 나는 금능해수욕장 앞에 섰다. 해변을 만끽하던 사람들 중 한 명을 골라 기념사진을 부탁했다. 인생 첫 하프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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