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하프 마라톤 (1/2)
서둘러 출발했어야 했다는 걸, 천진하게 낙조를 보며 달리다 깨달았다. 맑은 해변과 널어진 현무암이 조금씩 그 색을 바꾸는 모습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그건 서울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조금씩 뻐근해지는 걸 느끼면서 해안도로를 30분 정도 달렸다. 다행히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바닷바람이 거세 평소보다 느리게 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애초에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속도가 신경 쓰이진 않았다. 문제는 너무 늦게 출발했다는 사실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금능해수욕장에서 출발해 협재를 지나 한림항에 다다랐을 때, 태양은 수면 위에 겨우 떠 있었다. 한림항 인근 부두에 정박한 작은 배들이 점차 거세지는 바람에 흔들거렸다. 아직 반환점은커녕, 반환점의 절반에도 채 다다르지 못했는데 날이 거의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리에 힘을 더 주었지만, 역풍이 심한 탓인지 달리는 속도는 그다지 빨라지지 않았다. 오른발이 지면에 닿을 때의 느낌도 계속 신경 쓰였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지금껏 오른발만 팔자 (그러면 팔자가 아니지만 아무튼)로 걷고 있었다. 원인이 외회전인지 무릎이나 고관절 문제인지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이걸 의식하지 않고 편한 대로 뛰면, 오른쪽 발목이 쉽게 피로해지고 자세도 한쪽으로 무너진다. 교정해보고자 스트레칭도 하고 달리는 자세도 신경 쓰면서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쪽 엉덩이에 화살을 맞은 고라니처럼 절뚝거리며 뛰다 보니 어느새 주변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달렸다. 반환점에 가까워지는 구간은 바다와 조금 떨어진 도로에 가로등도 있어서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반환점을 돌아 다시 방파제 바로 옆으로 난 길에 다다르자 겁이 나기 시작했다. 파도가 부서지며 간간히 몸에 물이 튀었고, 주변에는 상가도 가로등도 하나 없었다. 안경을 쓰지 않아서인지 바로 발 밑도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갑자기 큰 파도가 덮친다면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만두고 숙소로 돌아갈지를 고민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탁탁탁 소리와 함께 거구의 남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윈드브레이커에 러닝 벨트를 찬 그는 순식간에 나를 제치고 달려 나갔다. 나보다 거의 두 배는 빠른 것 같았다. 구불구불한 길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본 것인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지? 나중에 기록을 보며 알게 되었지만, 그 구간에서 나는 km당 6분 5초로, 그날 레이스 중 가장 느린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그가 빠르긴 했지만, 내가 느리기도 했던 것이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쳐있었다.
이후 다시 속도를 올려 나름 안정적인 페이스를 되찾았다. 그때는 파도와 바람이, 어둠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신경 쓸 기력이 없기도 했다. 결승까지 4km 정도 남았을 무렵, 그 남자가 다시 저 멀리서 다가오는 걸 발견했다. 어찌나 땅을 힘차게 딛는지 멀리서부터 그가 뛰는 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들렸다. 그도 나처럼 비대면 마라톤에 참가한 걸까, 아니면 그냥 제주에 사는 러너일까. 그건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덕분에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1시간 59분 45초. 목표였던 2시간을 15초 남기고 가까스로 들어왔다.
하프만 해도 이 정도인데, 풀코스는 대체 어떻게 뛰는 걸까. 성취감과 패배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샤워를 하고 간단히 밥을 먹고 짐을 쌌다. 제주도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다. 다시 출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