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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하민 Dec 26. 2021

스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주도 취다선 리조트의 자기사랑 명상 클래스

제주 여행의 첫날밤, 러닝

자기 전 간단히 조깅을 한다. 숙소가 제주 올레길 1코스에 걸쳐 있어 따로 길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성산일출봉 방향으로 천천히 뛰었다. 여행의 첫날밤을 가벼운 조깅으로 마무리하는 건 올해 초부터 시작한 여행지 루틴이다. 숙소에 도착하면 짐을 풀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근처를 가볍게 뛴다. 이미 밤이 깊어 주변의 풍경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채 얼룩덜룩한 보도 블록을 따라 달린다. 서울의 여느 길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여행에 왔다는 실감도 별로 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첫 외출을 하며 그 풍경을 다시 바라보면, ‘내가 어제 이런 길을 뛰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새삼 어디론가 떠나왔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샤워를 하고 눕는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한 시간 정도 괴로워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일어나 노트북을 펼치고 이 글을 적고 있다. 일종의 여행기라고 해야 하겠다. 근데 이제 요가를 좀 곁들인. 알랭 드 보통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어떤 단체로부터 의뢰를 받아 경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쓰는 근사한 여행기는 아니겠지만, 비슷한 형식의 글을 나도 한 번쯤 써보고 싶었다. 그들만큼 재밌게 쓸 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혼자 여행하면서는 별로 할 일이 없다. 책도 계속 읽으면 지겹고, 그러다 보면 핸드폰으로 넷플릭스나 웹툰을 찾아보게 된다. 그러기는 싫다. 그런 건 집에서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오직 여행을 떠나야만 할 수 있는 일을 궁리하다가, 그런 일은 세상에 거의 없다는 걸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여행에 관한 글'을 '여행을 하는 도중에 쓰는' 치사한 정공법을 택하게 되었다. 물론 하루키와는 달리 경비는 내가 다 내고, 나에겐 이 글의 출간을 애타게 기다리는 독자도, 마감을 독촉하는 편집자도 없다. (그래도 브런치에 올릴 수 있으니 쓴다. 고마운 브런치.)


스님의 코골이 in 오라토리움

테라스에 앉아 돌담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녹차밭을 보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어젯밤은 길고 괴로웠다. 자정에 노트북을 덮고 누웠지만 네 시가 넘을 때까지 잠이 오지 않았고, 겨우 선잠에 빠졌다가도 다시 깨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래서 오전 7시 명상을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켰을 때는 며칠 못 잔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처음에는 나와 선생님 둘 뿐이었다. 리조트 지하에는 큼직한 스피커에서 티벳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50여 평 규모의 수련 공간이 있다. 여기선 오라토리움이라고 부른다. (모라토리움이랑 헷갈리는 이름이다.) 가운데 재단 같은 곳에 감색 민무늬 티셔츠를 입은 선생님이 홀로 앉아있었다. 원슈타인처럼 깊고 진실한 눈을 가진 그를 따라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으니 곧이어 너뎃 명이 더 들어왔다. 모두 여자였다. 마지막으로 미얀마 고승이 입을 법한 검붉은 승려복을 입은 스님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느릿느릿 걸어 들어왔다.


선생님은 자신을 길 코치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친절하지만 상투적이지는 않은 태도로, <위대한 개츠비>에서 닉 캐러웨이가 개츠비를 처음 마주쳤을 때 사용했던 표현처럼 '내가 원하는 만큼의 이해심과 믿음을 느끼게 해주는 미소'를 지으며 자기사랑 명상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20분 정도 호흡에 집중하면서 요가 동작과 비슷한 스트레칭을 했다. 그다음 자기사랑 명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사바 아사나로 편히 누워 길 코치의 가이드를 따라 명상을 한다. 스토리는 대략 이랬다. '여러분은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울고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가만히 바라봅니다. (...) 이제 그 아이는 웃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나입니다. 꼭 안아줍니다.' 나는 언제나 흐리멍덩해 보이던 앨범 속 유년의 나를 상상하며, 눈가가 촉촉해질 만큼 몰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커겅! 하는  소리가 오라토리움을 가득 채웠다. 미얀마 고승이 있는 우측 구석자리에서 나는 소리였다. 난생 그렇게  코골이 소리는 처음이었다. 우리 아버지보다도, 몸무게가 100kg  친구보다도 컸다.  코치의 명상 내레이션이 절정을 향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코골이 소리에 묻혀 당최 내레이션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코치는 말하기를 잠시 멈추고 내면 탐구를 방해받는 중생들을 위해 스님의 단잠을 깨워야 하나 고민하는  보였다.  와중에 스님은 본인의 코골이 소리에 깜짝 놀란  잠에서 깼다.  코치는 다시 명상 수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안에 스님은 다시 잠들었고, 어김없이 다시 벼락같은 코를 골았다.  코치는  춘다.  꼬리잡기가 명상이 끝날 때까지 반복되었다. 마지막에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거의  지경이었다.


오전 명상 수업이 끝나고 뭔가 아쉬움이 남아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때, 길 코치가 내게 다가왔다. 우리는 요가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골반이 열리지 않는 괴로움을 토로하자, 그는 꾸준히 스트레칭을 해주어야 한다고 조언해주며 몇 가지 동작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골반이 열리기 위해선 골반의 가동 범위, 즉 유연성뿐만 아니라, 내전근, 이상근, 둔근 등 골반을 둘러싼 다양한 근육의 발달이 중요하다고 했다. 본인도 처음엔 나와 비슷했지만 2년 정도 꾸준히 수련하니 많이 좋아졌다고. 그 역시도 본격적으로 요가를 시작한 지 4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이 위안이 되었다.


여행에 와서 불면증에 시달릴 줄도, 오전 명상이 이렇게 웃길 줄도 몰랐다. 성산일출봉의 계단은 생각보다 가팔랐고, 광치기 해변의 모래는 의외로 갈색이었다. 여행은 이렇게 기대하고 상상했던 것과는 언제나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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