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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Mar 21. 2019

이 땅에 내가 머물 집 하나

집 없는 유목민

포르투갈 태양의 나라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실외로 나오자 햇빛이 화살처럼 강렬하게 내리 꽂혔다.


ㅣ안녕, 그럼 갈까?


조안나(Joanna)를 처음 만났던 곳은 포르투갈 포르투의 랜드마크 생반투 기차역이었다. 우린 어색한 표정으로 대충 악수를 했다. 기차역을 나오자 걱정부터 앞섰다. 외국인 스냅 투어는 처음인데 의사소통이 잘 안되면 어쩌지.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긴장 때문인지 햇빛 때문인지 등골에서 땀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29살, 그야말로 20대의 마지막 유럽 여행이었다. 큰 마음 먹고 추석 기간에 일주일 붙여서 연차를 냈다. 줄곧 꿈만 꿔왔던 2주 간의 휴가는 회사에서 눈치는 눈치대로 받고 경유 왕복 비행기 값은 200만 원을 웃돌게 지불해야 했다. 일단 지르긴 했지만 다달이 갚아야 할 카드 값을 생각하면 한숨이 푹푹 나왔다. 이렇게 가는 게 맞는 걸까 싶다가도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됐다. 출국하기 하루 전날엔 안정을 넘어서 이왕 가는 거 좀 특별했으면 싶었다. 전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스냅사진을 찍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유명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에게 스냅 비용을 문의했었다. 시간 당 40만 원에 달하는 비용을 내라는 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 돈이면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주일은 머물 수 있는 비용인데. 단념하고 그 후에 찾게 된 게 에어비앤비 트립이었다. 숙박 공유만 되는 줄 알았던 에어비앤비엔 트립이라는 서비스가 있었고 그 안에서 포르투에서 서핑 배우기  포르투 토박이와 함께하는 스냅 워킹 투어  포르투 에그타르트 만들기  다양한 이색적인 체험 활동을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프립과 같은 앱이라고 보면 되는데 나 같은 관광객 입장에서는 소정의 비용을 내고 체험 활동뿐만 아니라 현지인(트립 호스트)과 교류도 할 수 있어서 꿩 먹고 알 먹고였다.


조안나는 수많은 트립 호스트 중에서도 후기가 채 30개도 되지 않는 신생 호스트였다. 조안나 트립을 클릭하면 제일 먼저 여기저기 금이 간 노란 시멘트 벽이 보였다.  노랑이 주는 발랄하고 따뜻한 느낌이 좋았다. 홀린 듯 조안나에게 스냅사진을 의뢰했다. 노란 벽 앞에는 이목구비가 아주 또렷한 외국인이 활짝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이 배경색과 너무 잘 어울렸다. 바보 같지만 이런 순간을 담는 사람이라면 어쩐지 밝고 따뜻한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린 기차역에서 5분 정도 걸어가 시계탑 근처에 도착했다. 시계탑 옆에는 광장이라 말하기도 뭐한 조그만 원형 잔디밭이 있었고 잔디밭 정 중앙에 생뚱맞은 펍이 하나 보였다. 현대식으로 디자인된 조그만 펍에선 R&B, 힙합음악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엔 족히 100년은 그 자리에 있었을 법한 낡은 시계탑이 시끄러운 음악에 둘러싸인채 미약하게나마 자기 존재를 알리고 서있었다.

 

 ㅣ여기가 요즘 가장 힙한 Base라는 곳이야. 저녁이 오면 젊은애들이 다 여기 모이거든. 저기서 맥주를 사서 잔디밭에서 춤을 추며 놀아.     


 조안나는 트렌디한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리고선 곧장 탑으로 시선을 돌려 탑의 역사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조안나가 해주는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들을 흘려들었다. 관광에 필요한 팁들만 추려가며 기억했는데 가령 탑에는 수많은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올라가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것, 포르투를 가로지르는 강을 따라 노란 트램이 다니는데 그 트램의 종착지가 여기라는 것과 같은 내용들이었다. 조안나가 말하는 것들은 모두 경험에서 우러나온 꿀팁이었지만 지나가는 여행자가 듣기엔 내용이 너무나 방대했다.


그와중에도 Base에선 끊임없이 음악이 흘러나왔다. 내 얼굴은 조안나를 보며 끄덕이는데 손가락은 까딱 까닥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고 있었다. 탑보다는 Base에 관심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조안나는 조리개를 열고 카메라를 들었다.

 

 ㅣ저기 가서 서볼래? 이렇게 사선으로 서서 자연스럽게 하늘을 바라보는 거야.   


 시계탑을 배경으로 두고 그 앞에 섰다. 몇 번의 셔터음이 울렸다. 이윽고 조안나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손짓으로 가자는 제스처를 추가했다. 도보를 따라 내려오는 길엔 그녀가 말해줬던 노란 트램을 보았다. 샛노랄 줄 알았던 트램은 빛바랜 상아색이었고 여기저기 긁혀서 흠집이 나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덜컥덜커덕 둔탁한 소음도 났다. 나는 그때 바퀴 달린 교통수단이 사람이 걷는 것보다 느릴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속도도 외관도 생전 봤던 트램 중에 제일 낡은 트램 같았다. 역시 여행은 직접 가서 보고 느껴야 아는 거였다.

 

스냅 투어가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우린 자연스럽게 서로의 나라나 자라온 환경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마냥 앳되보였던 조안나는 서른 후반의 나이에 한 번의 이혼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대화하는 도중에 그녀가 자주 간다는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포르투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도오루 강이 시내 정가운데 위치해있고 양 옆으로 레고 같은 주택들이 층층이 쌓여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ㅣ와! 집들이 노랗고 핑크색이고 어쩜 이렇게 예쁘게 차곡차곡 쌓여 있는 거지? 예술이야 정말.


 조안나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ㅣ진짜 예술가들이 만들었으니까. 여긴 원래 달동네였어. 생활이 힘드니깐 밝고 활기차게 되라고 아티스트들이 이런 색으로 페인트칠을 한 거야. 그런데... 지금은 여기가 가장 비싼 동네가 됐지.


들떠있던 그녀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침체됐다.  머쓱해져서는 와, 예쁘다, 밝아 보이네 바보 같은 감탄사만 남발했다. 얘기를 듣고 이 동네를 다시 보니 언젠가 한번 갔던 부산의 감천 문화 마을도 떠올랐다. 그래. 비단 여기만 그런 게 아니잖아 싶어서 나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ㅣ우리나라에도 이런 게 있어. 내가 사는 서울이랑은 좀 멀지만.... 거기도 여기 포르투처럼 두 번째로 큰 도시야.


조안나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자신감이 붙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ㅣ내가 사는 곳도 집값이 늘 문제야. 나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집을 갖고 있지 않아. 우스갯소리로 화장실만 내 거고 나머지 은행 거란 말을 하곤 해.    


천만에 육박하는 서울 시민 중 자기 집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고층 빌딩과 쇼핑몰이 가득한 서울에 하우스 푸어가 얼마나 많은지 조안나는 과연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포르투의 집


나 또한 집이 없는 유목민에 불과했다. 대학을 서울로 진학한 후 졸업할 때까지 줄곧 학교 기숙사에 지냈다. 취업을 한 후에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사는 대가로 부엌과 방이 분리된 1.5룸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는 2주 동안에도 다달이 나갈 돈을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가 아파지려 했다. 조안나는 그런 나를 보며   


 ㅣ처음에 이곳 다운타운엔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았어. 저 강 너머 바다 쪽이 부자들이 사는 곳이었거든. 너도 보다시피 여긴 좀 시끄럽고 낡고 좁고 불편하거든.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 그러니까 강이 끝나는 곳엔 너른 바다가 있었다. 저 먼바다를 보다가 다시 우리 발아래 모여있는 다운타운 집들을 내려다보았다. 나무젓가락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오색 건물들에 조금의 틈조차 버겁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다.


  ㅣ그런데 점점 은행이나 큰 건물들이 생겨나고 그쪽에서 살던 사람들이 넘어와서 여길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켰지. 이제 나나 우리 세댄 여기 살고 싶어도 살 수 없어. 엄~청나게 비싸거든. 트렌드를 따라서 아까 그런 베이스(Base) 같은 곳도 생겨났고...


조안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 지었다. 이 전망대 뷰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었다며 카메라를 들었다. 셔터에 손을 올리며 활짝 웃으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리개가 열리고 셔터가 펑하고 터졌다. 빛 속에서 조안나의 얼굴이 눈에 담겼다. 웃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ㅣ어릴 때만 해도 여길 찾아오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야.


혼잣말처럼 읊조리며 사진을 찍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세상 밝아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그 뒤에 가려진 슬픔이 더 많을 수 있단 말이 있다면 바로 이런 순간에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포르투 다운타운의 낡은 건물

여의도의 장미아파트만큼이나 비싸고 오래됐을 법한 건물들 사이사이로 오래 입은 것 같은 빨래들이 나부꼈다. 조안나의 말을 듣고 보니 이 마을의 풍경이 서민적이지만 마냥 서민적일 수만은 없는 풍경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전망대를 내려와 다시 강바람을 맞으며 그 길을 한참 동안이나 걸었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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