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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Nov 17. 2019

나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인간과 실천하는 크로스핏터

좀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 해가 끝날 때면 어김없이 내년에 이루고 싶은 목표를 쓰고 올해를 되돌아보며 한숨 쉬듯 인간이란 아무래도 전보다 나아지기 어려운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슬기야 진짜 네 의지가 대단하다"


어느 날 뒤에서 내가 운동하는 걸 보고 있던 오빠가 한마디 했다.  여기서 의지란 어제보다 한 개라도 더 해보겠다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다시 말해 악으로 깡으로. 오빠의 박수소리와 함께 타이머가 울렸다. 어제보다 7개를 더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기어코 내가 해냈구나.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어제의 나를 이겼다.




크로스핏은 보통 하루에 두 번 하기 힘든 운동이다.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의 효과를 내야 하는 고강도 운동이기 때문에 한번 하고 나면 전신에 힘이 풀렸다. 어느 정도냐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입고 있는 운동복은 빨래 돌린 것 마냥 땀이 흥건해졌고 바닥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 올 때 하수구 없는 아스팔트 도로를 연상하면 떠올리기 쉬운데 빗물 대신 땀이 바닥에 흥건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쏟아낸 사람들은 탈진해서 누워있거나 무척추동물 마냥 흐물흐물 기어 다녔다. 몇 보 안 되는 거리를 어린아이처럼 기어 다니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헛웃음만 나왔다. 한번 운동할 때도 일이 이러하니 같은 운동을 두 번 수행해야 할 때에는 아무래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멘탈이 보통 단단하지 않으면 똑같은 운동을 두 번 다시는 못 할 거라고. 뻔히 힘들 걸 아는데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그러니 만약에 꼭 두 번 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생각하기 전에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가능한 게 크로스핏이라는 운동이었다.


크로스핏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전 세계 크로스핏 챔피언을 뽑는 대회 크로스핏 게임즈(Crossfit games)열리는데 이 게임의 예선전으로 크로스핏 게임즈 오픈(Crossfit games open) 5주에 걸쳐 진행하고 있다. 오픈은 각 나라별로 남/여 1등을 가리기 위한 운동인 5주 동안 5개의 운동을 수행해서 공식 사이트에 기록을 올리면 최종 기록이 가장 높은 선수가 게임즈에 출전하게 된다. 한국 시간으로는 보통 금요일 오전 9시에 한 주의 운동이 공개되고 그다음 주 화요일 오전 9시까지 운동을 수행한 후 기록을 올릴 수 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알아챌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한 번으로 충분한 크로스핏 운동을 오픈 기간에는 여러 번 반복하게 된다. 기록을 올릴 수 있는 나흘이라는 기간 동안 누구나 자기 기량을 최대한 뽐내고 싶기 때문이다. 최선의 점수를 내기 위해 사람들은 똑같은 운동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반복해서 진행한다. 물론 하루에 한 번 이상 운동을 수행하기 힘들기 때문에 보통은 오늘 한번, 내일 한번, 모레 한번 진행한다. 정말로 급할 땐 하루에 두 번도 하긴 한다. 나 또한 이번 20.1 오픈에는 같은 운동을 하루 한 번씩 총 세 번 수행했다. 두 번째에는 처음 했던 전체 기록보다 21개를 더, 세 번째에는 두 번째보다 7개를 더했다. 일이 이러하니 오빠로부터 슬기야 네 의지가 대단하다경탄 어린 말을 듣게 되는 거였다.




"오픈은 자기 한계를 넘는 도전이다. 오픈이 멋있는 이유는 자기 취약점을 개선하는 데 있다."


오픈을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로 검색하다 보면 이런 말을 종종 볼 수 있다. 운동이 공개되고 측정 기록을 올릴 수 있는 시간은 단 4일. 이 시간 동안 사람들은 숱하게 고민을 한다. 이 운동을 이전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더 못하면 어떡하지? 5분 생각해서 답 안 나오는 일이면 그냥 해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생각이란 놈은 자가증식 생물처럼 끝도 없이 이어진다.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다 보면 정말로. 더. 하기 싫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도전하면 반드시 얻는 게 있다. 실제로 오픈 기간 동안 여러 번 도전 끝에 그동안 못했던 운동 동작을 수행하게 됐다는 사례가 속속들이 올라온다. 오픈이라는 대회가 곧 자기 발전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내 경우에는 하다 보면 전보다 조금은 더 낫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다음 측정을 결정했다. 기록이 나아지면 물론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운동 숙련도나 체력적인 측면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면 최소한 후회는 안 하겠지.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한 덕분에 재도전의 용기를 얻는다. 신기하게도 늘 처음보다 두 번째가 두 번째보다 세 번째가 더 낫긴 했다. 어찌 됐든 이번에도 세 번을 했고 하고 나니 속은 시원했다.


2019년 10월의 가을날,

내가 선릉의 어느 지하 박스 공간에서  땀 흘리며 같은 운동을 세 번 반복하는 동안 아프리카 케냐 출신 마라토너 킵초게는 2시간 만에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기적을 이룩해냈다.


리우 올림픽 42.195km

1시간 59분 40초


인간이 서브 2를 기록할 수 있나. 보고 있으면서도 경이롭기 그지없었다. 육상 동영상을 보다가 킵초게를 향한 찬사 기사를 일일이 찾아보았다. 그는 처음에 육상 선수였다고 했다. 선수 생활을 오래 하고 싶어서 마라톤으로 전직했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록을 만들어 냈다. 올림픽 출전 세 번만에 금메달을 목에 건 남자, 도무지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킵조게가 남긴 명언이 있는데 No human is limited (인간에게 한계란 없다)


아무렴 그의 세 번과 나의 세 번은 확연히 다르겠지만 단 하나 분명한 사실은 있다. 우리네 인생과 곧잘 비유되는 마라톤이 그러하듯 계속하다 보면 뭐든 좀 더 나아진다는 것이다크로스핏 오픈에서는 제한 시간 안에 운동 동작 한 개만 더해도 세계 기록 몇 천등, 많게는 몇 만 등이 왔다 갔다 한다. 나흘 동안 세 번 도전 만에 28개를 더했으므로 기록으로만 따지면 나는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육상 선수에서 마라톤 선수로 전직한 킵조게 또한 두 번째에서 멈췄다면 지금과 같은 세계 신기록을 낼 수 없었을 거다. 킵조게는 뛰기 전에 이런 말을 했는데 "마라톤 2시간 벽 돌파는 인류가 달에 발을 처음 내딛는 것과 같다"  레이스를 마친 후에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게 없다는 걸 알릴 수 있어 기쁘다. 많은 사람의 도움 속에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었다" 고 했다.


나는 인간이 좀 더 나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무언가를 가지면 더 가지고 싶어 하고, 있는 것보다 없는 것에 더 목말라하는 이유도 우리가 끊임없이 불완전한 우리 자신을 채워가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욕심이 아닌 성장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이는 더없이 좋은 신호이다. 성장하는 인간에게 한계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 크로스핏을 통해서도 달리기를 통해서도 나는 매일 그걸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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