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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Oct 11. 2022

박물관은 싫지만 미술관은 좋아

기획 전시회가 아닌 일반 박물관은 삶이 지나치게 재미있는 일들로 가득 차서 조금은 진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때나 방문할만한 곳이다. 정말 단순하게 물건을 전시하는 것에만 충실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전시품의 배치, 관람객의 동선 모두 박물관 운영자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맞춰 만들어진 것일 뿐, 그것이 관람객에게 닿는 과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니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전해질 리 만무하다. 역사 교육에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겠지만, 이래서야 잘 정돈된 골동품 가게와 다를 것이 없다.



박물관과 비슷한 이유로 나는 고전 미술을 싫어한다. 마치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작가의 심정을 묻는 질문처럼, 이미 정해진 답을,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서술하는 것이 싫다.


그런데 왜일까? 트레팔가 광장을 지날 때마다 내셔널 갤러리만큼은 직접 들어가서 보고 싶은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저녁 먹기 전까지 잠시 시간이 남았던 그날, 내셔널 갤러리 속으로 들어가 작가들과 직접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내셔널 갤러리는 대영박물관과 달랐다.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전시 중인 작품 속 정교함에도 감탄하게 되지만, 관람객의 편의를 고려한 동선과 내부 구성에도 깊이 매료되었다.


두 장소에서 전시 중인 것들 모두가 소중히 보관되어야 하는 작품임에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두 장소의 분위기가 이렇게나 다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단순히 박물관과 미술관의 차이인 걸까? 현대 미술품이 상대적으로 조도에서 자유롭기 때문일까?


아니면 두 장소에 전시된 작품들이 관람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작품 그 자체가 가진 존재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들 중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두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오묘하지만 선명한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잠시 들렸던 날에도, 나는 박물관에서 지루함과 찝찝함만을 얻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종종 생각한다. 


박물관이 조금 더 살아 숨쉬는 공간이 된다면, 미술관과 얼추 비슷하게라도, 단순히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의 공간이 아닌,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공간이 될 수 있지도 않을까?



내셔널 갤러리의 작품 중에서는 특히 고흐의 해바라기가 주는 충격이 실로 대단했다. 해바라기에 사용된 노란색은 고흐가 가장 좋아하던 색이자 그의 친구 베르나르는 노란색이 '고흐가 그림뿐 아니라 항상 마음속에서도 꿈꾸던 색'이라 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다양한 노란색이 사용되었는데, 함께 섞인 듯 하지만 섞이지 않은 색들이 한데 모여 고흐 특유의 색감을 만들어 낸다. 나는 캔버스와 물감이 만들어내는 질감과 여러 색이 섞여 나타나는 고흐만의 색감에 사로잡혀 한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사실 그의 작품이 주는 느낌을 하나의 단어 또는 문장으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의 그림에는 그림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그림을 넋 놓고 바라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내셔널 갤러리에서 고흐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면,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혼이 나간 표정으로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저녁 먹기 전까지 잠시 시간이 남았던 그날, 내셔널 갤러리 속으로 들어가 작가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고 나온 뒤, 나는 한동안 잊고 있던 색감 공부를 다시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브랜드와 색, 상품과 색, 공간과 색이 만날 때, 그곳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비록 천재적인 재능은 없는 나지만, 그렇기에 그들이 보지 못하는 영역을 보고, 그것들을 하나로 합쳐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내게는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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