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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Oct 11. 2022

향기는 단편적인 기억을 담는다

런던에서 만난 커피의 향


런던 속의 작은 정원, 닐스야드(Neal's yard). 닐스야드 근처에는 런던 최고의 커피를 판매하는, 보물과도 같은 장소가 있다. 바로 1978년부터 코벤트 가든의 몬머스 스트리트에서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팔기 시작한 몬머스 커피(Monmouth Coffee)이다.


몬머스 커피는 닐스야드의 알록달록한 노천카페를 지나 만나는 골목길 위에 위치해있다. 구글 맵을 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주변 상점들이 대부분 검은색에 하얀색 글자가 박힌 간판을 사용하고 있어 아차 하면 길을 헤맬 수 있으니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만이라도 잠시 내 손에 들린 스마트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 좋다.



몬머스 커피의 매장은 한국의 프랜차이즈 카페에 비하면 턱없이 작다. 내부는 가로가 좁고 세로로 긴 구조였는데, 종종 출입문부터 카운터 근처까지 두 개의 긴 줄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줄은 주문을 기다리는 줄과 앉을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줄로 나눠져 있는데, 고객은 매장에 들어와 주문을 한 뒤 테이크아웃 여부를 결정하고, 매장에서 쉬어가기를 원하는 경우 다른 줄로 옮겨가 직원의 안내를 기다린다. 의도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매장 구조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매장 직원과 고객의 대부분이 이 암묵적인 규칙에 따라 주문을 받고, 주문을 기다린다.


나는 메뉴판을 보고 한참을 서서 고민하다 플랫 화이트(Flat White) 한 잔을 주문했다. 에스프레소와 스팀밀크가 혼합시켜 만든 커피를 플랫 화이트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런던에 왔으면 플랫 화이트 한 잔 정도는 마셔야지'하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을 뿐 그게 뭔지도 모르고 주문을 했더랬다.



내가 이날 기억하는 건, 뭔지도 잘 모르고 주문한 플랫 화이트를 한 모금 홀짝이고 나서 입안에 퍼지는 달콤 쌉싸름한 맛에 충격을 받고는 급하게 구글링을 해봤다는 것 한 가지와, 몬머스의 커피 맛이 특출나게 좋은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매장 전체를 휘감고 있는 커피의 향과 바쁘게 돌아가는 커피 그라인더의 진동, 그리고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섞여 공간을 가득 채운 그들만의 분위기가 좋았다는 것 한 가지.


런던에서 만난 초콜릿의 향


런던 기념품 쇼핑의 필수 코스 중 하나인 엠앤엠 월드, 입구에서부터 솔솔 풍겨오는 달콤한 냄새에 이끌려 들어가니 형형 색색의 작은 초콜릿들이 나를 반겨준다. 시각, 후각, 촉각을 만족시켜주는 매장 구성에 한번 감탄하고, 매장 내에서 제공하는 다채로운 컨시어지 서비스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지나치게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매력을 가진 향이 초콜릿과 커피 말고 무엇이 있을까?


런던에서 만난 밤공기의 향


새벽 공기와 밤공기의 향은 다르다. 새벽에는 머리 주변에서 포슬포슬 거리며 돌아다니는 시트러스 향이 난다면 밤에는 어깨 아래에서 출렁이는 은은한 스모키 향이 난달까. 그래서 새벽보다는 밤공기가 사람에게 안정감을 준다.



집에서 아무리 멀리 떠나온 길이더라도, 도시에 어둠이 내리면 그곳이 바로 여행자의 집이 되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잠든 저녁, 나는 런던의 밤거리를 꽤 오랜 시간 거닐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도 잠시 잊은 채, 그렇게 한참을 또 다른 이방인과 현실과 이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잘 알지 못하는 도시의 어느 골목을 걷고 또 걸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도시에서, 나는 알게 모르게 안정을 얻고, 또 다른 꿈을 얻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있었다



향기는 음악처럼 인간의 단편적인 기억을 담는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고 퍼져나간 커피와 초콜릿의 향, 그리고 그날 저녁에 내 어깨 근처에 묻어있던 밤공기의 내음새가 내가 방문한 매장과 런던에서 보낸 하루의 이미지를 만들고, 나는 그 이미지를 통해 여행의 추억을 떠올린다. 


누군가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장면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크기의 향을 내어줄 수 있다면, 그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은 흐릿해지겠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추억을 갖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꿈은, 누구에게, 어떤 향을, 어떤 크기로 내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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