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회사에서 인턴을 하며 알게 된 프랑스 친구와 파리에서 3년 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메신저 모먼트에 가끔 올라오는 사진들을 통해 서로의 근황만 대충 알았을 뿐, 연락을 자주 주고받지는 않는 사이였는데, 신기하게도 그간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그 시절에는 이런 것들이 좋았었지.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곤 했지.
우리는 짧게 서로의 근황을 묻고서 저녁 식사 전, 잠시 시간이 난 틈을 이용해 유람선을 타러 갔다. 유람선을 타러 가는 길, 어느새 해는 모습을 감췄고 저 멀리 지평선부터 천천히 어둠이 올라왔다. 아직 어둠에 집어삼켜지지 않은 하늘은 검다기보단 푸른빛이 감돌았고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이 작게 반짝이며 나무 사이로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여행지의 하늘은 분명 내 일상의 것과 다른 게 없는데, 여행이 주는 시간적 여유는 평범한 것을 반짝이게 만든다. 도망치듯 쉼을 찾아 떠나온 이곳에서 나는, 일상에 치여, 아니 어쩌면 일상에 치여 살아간다는 핑계로 내가 놓아버리고 살아가던 것들을 자주 만났고, 그제서야 그들의 반짝거림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쉼과 멈춤이 죄악으로까지 여겨지는 사회에서 나는,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놓아버린 채 살아가고 있던 걸까?
자그마한 구멍이 뚫린 좁은 매표소에서 표 두 장을 구매한 뒤 각자 하나씩 나눠 쥐고선 개찰구로 향했다. 배를 타기 위해 잠시 멈춰 기다리는 시간, 뒤에서 익숙한 단어가 들려온다. 주차장에 세워진 거대한 버스에서 내린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다.
머나먼 타지에서 자국민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도 '이곳에서는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 '나는 이곳에서 완벽한 이방인이다'라는 여행의 특권을 조금 빼앗겨 버리는 것 같아 왠지 모르게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지금 내가 프랑스에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인종 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한 국가이지만,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국가인 만큼 피부색으로 국적을 판단하기 애매하다는 장점이 있다. 옷차림이나 행동 등 여행자임을 유추할 수 있는 힌트는 곳곳에 숨어있지만, 섣부르게 판단을 내렸다간 인종차별자로 몰리기 십상이니 그 누구도 쉽게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어디를 가든 간에 사회적인 시선과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낭비할 시간과 감정은 없다.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 보내는 1분 1초가 아깝기도 하고, 예로부터 멍청한 애들과는 말을 섞지 않는 거라고 배웠다.
사실 요즘 다인종 국가가 아닌 나라가 어디에 있겠느냐마는 이런 특징 덕분에 나는 파리에서 때론 그들의 일상에 스며든 누군가의 동료, 가족, 친구의 모습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고, 또 일상에서는 배제된 완벽한 이방인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생각이 매듭을 지을 때 즈음 도시는 어느새 짙은 어둠으로 덮였고, 영국의 것보다는 조금 더 무거운 향이 센 강과 함께 흘렀다. 명품 브랜드의 고향이자 낭만의 도시로 불리는 파리의 밤은 도시를 흐르는 센 강처럼 조용히 흘렀다.
밤이 되면 여느 도시와 같이 파리는 새로운 활기를 찾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도 따로 또 함께 흘러가는 시간을 즐길 뿐이었다. 왁자지껄하고 정신이 없기도 한 서울의 밤과는 다르게, 파리의 밤에는 지켜지는 선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식당, 바(Bar),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항상 많이 모여 있었지만, 그중에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참 이질적이면서도 좋아 보였다. 왠지 모르게 그게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단면인 것 같아서. 그들에게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일상에 스며든 지 오래된 가치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마저도 내가 이방인이기에 볼 수 있는 일상의 작은 환상 비슷한 걸 수 있겠지.
무겁다면 무겁고 가볍다면 가벼운 공기가 흐르는 파리의 두 번째 밤이 찾아왔다. 영국을 떠날 때 마음속에 피어오른 여러 걱정이 무색할 만큼, 파리는 빠른 속도로 내게 스며들고 있었다. 내일은 내가 일상에서 잃어버린 것들 중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