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기억을 없애주세요.

by 열혈정신과

드물게 "제 기억을 없애주세요." 라는 주소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면, 그 말은 이런 뜻이다.


어떤 사건이나 오랜 경험, 혹은 그때 느꼈던 감정 때문에 너무 고통스럽다. 그 일을 떠올리는 데에만 에너지가 다 소모되어서, 일도 사람도 일상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니 그 감정을 무디게 해달라. 그 기억과는 조금도 닿고 싶지 않다. 닿을 수밖에 없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차단해달라. 약이라도 좋고, 술이든 잠이든 쇼핑이든 여행이든, 다른 생각으로 덮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다.


비유하자면 기억과 감정을 '삭제' 해달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뇌에는 '삭제'라는 개념이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은 없었던 일로 되돌릴 수 없고, 한 번 경험한 것을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 방법은 없다. 기억은 파일처럼 휴지통으로 보내졌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생성되면 어떤 형태로든 남는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최선은 대개 삭제가 아니라 ‘숨김’이다. 컴퓨터로 치면, 특정 파일을 숨김 폴더에 넣어두는 일에 가깝다. 혹은 메모리 사용량 현황판을 열고, 그 사건과 그 감정에 대해서만 ‘보이지 않기’를 설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보이지 않게 해두었다고 해서 용량을 차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메모리를 덜 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숨김 처리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해진다.


이 과정을 다른 비유로 말해보자면, 괴물이 들어 있는 박스같은 것이다. 괴물은 너무 무섭기 때문에 우리는 박스를 절대 열어보려 하지 않는다. 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열지 않는 것이 아주 합리적인 선택이다. 당장 살아남기 위해서는 박스를 봉인하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하지만 박스 안에 들어 있는 괴물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그 안은 어둡고 비좁고 답답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괴물은 점점 더 불안해지고, 화가 나고, 박스를 쿵쿵 두드리기 시작한다. 가끔은 틈을 찾아 뛰쳐나오려고 한다. 그래서 박스를 닫아두는 전략은 처음에는 안전하지만, 오래 유지될수록 오히려 위험해지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방법들—술, 쇼핑, 여행, 끝없는 분주함—은 이 박스를 더 두껍게 봉인하는 도구에 가깝다. 볼륨을 잠시 낮춰줄 수는 있지만, 음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더 강한 방법을 찾게 된다. 더 큰 자극으로 덮으려 한다. 하지만 괴물은 여전히 그 안에 있다.


결국은 박스를 열어보는 수 밖에 없다. 가능한 안전한 방법으로. 예를 들자면 상담시간에만 열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상담시간에 벌어지는 일은 편안하지 않다. 괴물을 만나는 일이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이 과정은 '최적화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일과 비슷하다. 삭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용량을 줄이거나 메모리 사용량을 줄여줄 수는 있는 것이다. 기억을 지울 수는 없고 감정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길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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