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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Jul 17. 2020

내가 나를 돌보는 두 번째 양육

나를 사랑하기(2)



엄마 집에 갔다.

밥을 먹자고 밥통을 열었는데, 혼자 사시는 분이 10인용 밥솥에 밥이 한가득이다.

"엄마, 밥을 왜 이렇게 많이 했어?"

"집엔 늘 밥이 있어야지, 그래야 마음이 든든하지"


그래. 우리 집 밥솥엔 늘 밥이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는데, 매일 밤 일을 마치고 어두운 골목을 걸어 올라오던 어머니의 손에 들린 누런 종이봉투이다. 그 누런 종이봉투에는 우리가 내일 먹을 쌀이 담겨있었다. 시장에서 좌판을 해서 생계를 꾸리던 엄마는, 매일 밤 장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쌀집에 들러 내일 먹을 쌀을 사들고 오셨다. 흔히 하는 말로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살아야 하는 경제적 상황에서 쌀을 집에 쟁여놓고 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 매일 조금씩 쌀을 사야 했을 것이다.

마흔을 막 넘긴 여자가 혼자서 애 셋을 키워야 하는데, 매일매일 쌀을 사면서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엄마의 삶의 무게는 어떠했을까? 나는 감히 짐작도 할 수가 없다.       


아무튼 그렇게 들고 온 쌀로 밥을 지어 전기밥솥에 담아놓으면 우리 삼 남매는 학교에 다녀와서 그 밥으로 점심도 저녁도 스스로 차려먹었다. 그땐 전기밥솥이 아닌, 보온 기능만 되는 전기밥통이었는데, 그 전기밥통에 한가득 담겨있던 밥은 시간이 지나면 누렇게 변하고 냄새도 나고 딱딱해졌다. 밥맛도 이상하고, 엄마도 없고, 반찬도 매번 똑같고... 나는 밥 먹는 게 즐겁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먹는 즐거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대학을 가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친구가 한 번도 새 밥이 아닌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늘 갓 지은 새 밥으로 친구의 밥을 챙겨주신다고 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밥통에서 보온되어 있는 밥을 싫어하기 시작한 것이.


그 밥통의 누렇고 냄새나고 딱딱한 밥은,

엄마가 안 계실 때도 밥을 잘 챙겨 먹기를 바라는 엄마의 사랑과 돌봄의 표현이었겠지만

나에게 그 밥은, 엄마의 부재를 상징한다.      






지금은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가족들의 식사를 챙기면서, 나는 늘 새 밥을 지어먹는다. 아이들 방학 때면 하루 세 번을 새 밥을 한다. 나는 내 아이들이 새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하다.



문득, 생각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어쩌면 내 안의 어린 나도 함께 키우는 것이 아닐까.

어린 나의 결핍과 부족함을 알아가고 스스로 채워갈 수 있는 기회, 내가 나를 돌보는 두 번째 양육인 것 같다. 

                                        




여전히 실수하고, 여전히 상처를 주고받고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편안해졌고, 행복해졌습니다. 

제 자신을 수용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삶에 감사하게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저는 여전히 이 과정을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실수를 되풀이하면서요.

다만, 이 글이 누구나 스스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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