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온 지 이주차
세탁기 청소를 미루고 미루다
결국 하기로 했다.
이곳은 낡은 빌라이지만 찾아보기 힘든 옵션이 있는 집이었다. 물론 모든 게 다 오래되어 족히 이십 년 이상은 된 것들이었다. 오래되어 노랗게 떠버린 컬러감의 작은 냉장고, 아마도 안 쓴 것 같은 먼지 가득한 세탁기. 심지어 요샌 나오지도 않는 브랜드이다.
에어컨은 아직 겨울이라 쓸 일이 없지만, 냉장고와 같은 누런색이다. 벨을 누르면 울리는 인터폰 같지 않은 인터폰의 울리는 소리는 거의 386세대 컴퓨터 전자음이다. 있는 게 다행 일지 경이랄까. 보일러는 이젠 부품조차 나오지 않는 낡은 귀뚜라미 보일러였다.
이사 오고 나서 차마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더러운 세탁기였다. 혼자서 우선 청소를 해보고 안되면 업체를 부르기로 했다. 유튜브에 온갖 청소법을 찾아보고 일주일을 공부하고 과탄산소다와 청소용 솔을 사 왔다. 비장하게 시작했으나 결론은 세탁기가 더러워도 너무 더러워서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숨고에 들어가 전문가를 급하게 부르기로 했다.
아침 일찍 사장님이 오셔서 세탁기를 둘러보시더니 너무 오래되어서 안쪽 부품들은 다 깨져있고, 청소를 해도 작동이 될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결국 집주인분에게 연락을 드려서 잠시 내려와서 봐달라고 부탁드렸다. 집주인분은 대뜸 화를 내셨다. 왜 말도 없이 사람을 불렀냐는 것이었다. 처음 있던 일이라 사비로 청소를 하는 것도 다 말씀을 드렸어야 했나 의문이었다. 하여튼 화를 내시니 말씀을 못 드려 죄송하다고 하고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
근데 집주인 사장님은 화를 내시면서도 말도 안되는 오해를 하셨다. 자꾸 지난번 보일러를 고칠 때도 내가 먼저 사람을 불러서 비싸게 고칠 뻔하지 않았냐고 화를 내시는 것이다. 난 사람을 부른 적이 없다. 사장님이 처음 모시고 오신 분이 가격을 좀 더 높게 불렀고, 이후 다시 데리고 오신 사설업자분이 반값은 저렴하게 부르셨던 것은 기억난다. 근데 처음 비싸게 가격을 부른 사람을 내가 데려오지 않았냐고 우기셨다.
진지하게 이 분이 잊어버리셔서 그런 걸까 치매는 아니신가. 아니면 진짜 뭘까 순간 여러생각을 해봤다.
옵션있다고 돈은 더 받으면서 제대로 된 옵션도 없는 곳에 사는 나는 뭔가.
그냥 돈 없고 집 없는 세입자지 뭐야.
오해는 바로잡아야 했기에 제가 정확히 말씀드리겠다고 하며 우선 세탁기 청소할 때 말씀을 못 드린 건 죄송하다고 사과드렸다. 보일러는 누가 봐도 억울한 일인지라, 보일러가 고장 나서 연락한 시간부터 찾아오신 시간과 일자까지 정확히 말씀드렸다. 나중에는 집주인분이 시간이 지나서 본인도 잘 기억이 안 난다고 머쓱해하시는 것이었다.
세탁기도 너무 더러워서 청소를 한 것이라고 했다. 청소하느라 더러워진 거름망이 보이길래 이거 보시라며 제가 걸러내고 걸러내다가 안되어서 결국 전문가분 제 돈 주고 모신 거라고 했다. 세탁기가 더러워서 세탁방을 다녔고, 세탁방에서 한번 갈 때마다 든 돈도 말씀드렸다. 돈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돈이야기가 나오자 수그러드시는 기이한 현상.
그렇게 내 이야기를 듣던 사장님 부부들도 이제야 이해가 되셨는지 화가 누그러지셨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세탁기 청소하러 오신 분도 이 기종은 너무 오래되었으니 바꾸는 게 더 나을 거란 식으로 도와주셨다. 그러더니 결국 집주인분이 세탁기를 새로 사주겠다고 하셨다. 집주인 사모님도 집을 다 리모델링했는데 이런 전자제품들은 생각을 못 하셨다고 했다.
남아서 분해한 세탁기를 정리 중이신 사장님이 있는 사람들이 더 한다며 저렇게 오래된 세탁기를 쓰라고 하냐면서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분도 오간 길과 시간이 있어서 비용을 지불해 드리고 보내드렸다.
집 없고 돈 없는 설움이 갑자기 몰려왔다. 혼자서 청승도 맞네 싶다가도 내가 한 일을 곰곰이 돌아보았다.
세탁기 청소였어도 집주인분들에게 미리 말을 안 한 건 내 잘못, 집 제대로 안 보고 계약한 것도 잘못. 그 와중에 집주인 분들에게 오해된 상황을 잘 설명한 건 잘한 것. 나에게 그렇게 화를 내고 오해했으면서도 사과 한마디 없던 것은 그분들 잘못.
기껏 세탁기로 마음 상한 지금의 상황은 그냥 개서러움.
집으로 돌아와서는 기분도 풀 겸 내가 좋아하는 여행 유튜버들이 나온 여행을 보던 중이었다. 방글라데시에 있는 길거리에서 온갖 동물들과 파리들이 날아다니는 와중에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었다.
무념무상 보던 중 갑자기 깨달았던 사실 하나.
지금의 나는 너무 다 갖춰살려고 했다는 것이다.
세탁기도 정말 깨끗해야 하고, 뭣도 뭐도 다 더 값싸면서 좋은 것들을 찾느라 스트레스지 않냐고 말이다.
지금 내가 이렇게 서러운 건 집도 없고 돈도 없어서도 아닐지도. 그건 맞지만 그게 모든 이유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어차피 다 갖춰 살 수 없는 상황인데. 뭐랑 뭐를 비교하고 뭐가 더 나은지 재고 따지고. 그러면서 더 갖고 싶어 하고. 그냥 애초에 내려놓으면 될 일을.
근데 아직은 다 내려놓지 못하겠다. 좀 더 깨끗하고 편하고 싶으니까. 좋은 건 나도 갖고 싶으니까.
그럼 돈이라도 더 많이 벌어야 하는데 그럴 확률은 적고. 이건 마치 수행길인 건지도.
나도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