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저냥 ㅏ랑 Oct 02. 2024

'간악한 아틀라스'를 향하여


격월간 미스터리 잡지 《미스테리아》 이번 53호(2024년 9월호)부터 앞으로  1년 동안 VILLAIN이란 너를 아 '픽션 속 악의 재현'이란 주제로 연재를 하게 됐다. 벌써 예상한 분도 있겠지만 이 연재 기획은 돌고래에서 나온 작년의 앤솔로지 『악인의 서사』에서 시작되고 이어졌다. 앞으로 여기서 나는 현대의 문화에서 악의 재현이 어떤 수단과 방식으로써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고찰이 담긴 '짧고 쉬운' 글들을 차례로 발표할 것이며, 또한 이는 추후 만들어질 비평서 『간악한 아틀라스』(가제)로 이어질 예정이다. (참고로 이 비평서 기획은 아직 출판사를 끼지 않고 있다. 편집자분들의 연락을 기다린다는 얘기다) 첫번째 글의 제목은 「악, 악당, 부정적인 것의 삼각형」으로, 여기서 나는 서문 격으로 이 연재의 배경과 맥락에 대한 짧은 설명을 적었다. 달리 말해 이는 『악인의 서사』에 실었던 「악(당), 약동하는 모티프들」을 아주 거칠게 축약하고 좀 더 쉽게 정리한 판본의 글이며, 그렇기에 만약 「악(당), 약동하는 모티프들」이 잘 읽히지 않거나 이해가 안 됐던 분들은 이 글을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본다. 물론, '픽션 속 악의 재현'이라는 주제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도 한 번 저와 함께 해주시기를 권해본다. 개인적으로 (이번 주에 완결되는) 《채널예스》의 <써야지 뭐 어떡해>에 이은 두 번째 정기 연재이자 첫번째 단일 주제 연재라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첫 단독 주제의 비평서를 위한 사전 연재라는 점에서 많이, 아주 많이 긴장이 된다. 하지만 그만큼 여러분께서 흥미진진하게 읽으실 수 있는 글이 이어지도록 노력해보려 한다. 다시 한 번, 부디 함께 해주시기를.








"얼마 안 되어 같은 편집자로부터 또 다른 의뢰가 들어왔다. 「악(당), 약동하는 모티프들」에 쓰인 것과 쓰이지 않은 것을 확장하고 함께 묶어 책을 만들어보자는 얘기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사전에 연재를 하자는 제안도 함께. 사실 나는 늘 수동적인 한에서만 적극적인 편인데, 누군가가 무언가를 요구하면 그때부터 그에 대한 생각이나 행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하여 『악인의 서사』에 참여한 것 역시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런 만큼 글의 주제를 고르고 결정하는 데에만 약 두 달 가까이를 소비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되고 전개되어 아직까지도 온전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저 글 하나에서 멈추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나는 곧장 의뢰를 수락했다. 그리하여 악의 재현에 대한 고민을 여기에 다시금, 혹은 새로이 풀어놓게 된 것이다. 한데 그것은 대체 어떤 고민이며, 또 어째서 이렇게 공적으로 논할 필요를 갖는가. 아무래도 본격적인 이야기 전에 잠깐 배경 설명부터 시작해야겠다."


"어떤 이들은 악당과 악에 대한 주관적인 혼동과 선호, 즉 대중적 가치관의 ‘그릇된’ 변화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한다(가령 마이클 잭슨의 〈Bad〉처럼 ‘나쁜 것=멋진 것’의 도식을 공공연한 것으로 만든 경우를 떠올려보자). 하지만 반론의 여지가 있는데, (수많은 ‘어른’들이 착각하듯) 악당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해서 꼭 캐릭터의 악행에 그 자체로 공감하거나 모방하려는 충동을 느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조커〉를 저항자의 초상으로서 본 이들 중엔 당시 홍콩 민주화 시위를 이끌던 운동가들도 있었다. 혹은 (《미시간 데일리》의 맥스 뉴먼이 「퀴어 코드화된 디즈니 악당들을 되찾기」라는 에세이에서 쓰기도 했듯) 나를 포함해 어린 시절을 겪은 대다수의 퀴어들은 〈라이언 킹〉의 스카나 〈인어공주〉의 우르슬라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변태적이고 징그러운 악당들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듯 어떤 행위나 그 결과가 항상 같은 힘과 맥락에 의해 일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자. 이 모티프들은 악의 어떤 이미지를 얻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로 악을 이루는 요소가 아니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셸링이 주의 깊게 말했듯 “힘들의 무질서를 가지고 이 근원적인 악행을 추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즉 모티프들 자체에 악의 성질이 깃들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령 살인을 한 사람이 곧장 악의 화신이 되는 건 아니라고 우리 주변의 여러 픽션들은 강변해오지 않았던가? 영웅의 폭력, 불가피한 방어, 카타르시스를 주는 복수, 사회적 다이내믹스의 복합적인 효과. 게다가 앞서 나는 이 모티프들이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으며 또한 악을 재현하는 방식들도 그에 따라 변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구분하거나 파악하지 못하는 성싶다. 그래, 19세기 서구에서 드니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 이래 비로소 발견되고 발전해온 이런 예민한 인식은 아직까지도 온전히 ‘우리’의 것이 아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최수진의 『점거당한 집』에 해설을 실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