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인 최수진의 소설(집) 『점거당한 집』에 「예술에 대한 장소에 대한 예술」이란 제목의 해설을 썼다. 『점거당한 집』은 '원전 사고가 일어난 2030년대 한국'이란 공통의 세계관을 바탕 삼은 세 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책으로, 경장편이 아닌 단편 묶음이 박지리문학상을 수상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나는 여기서 최수진이 '소설', '예술', '장소'의 삼항을 서로 공명하는 문제로 설정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이 삼항이 어떤 면에서 서로 닮았으며 그 공명을 최수진이 어떻게 소설로써 소화하는 지를 짤막하게 논해보았다. (여담이지만, 최수진은 만화비평모임의 첫 기획이었던 워크숍 "<러스티 브라운>으로부터"의 멤버이기도 했다) 하나 사실 이 글에 대해선 여러모로 면목이 서질 않는다. 집필 기간 동안 내게 여러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특히 다리를 또 다시 다치고 독감에 걸리는 등 몸이 자꾸 성치 못했고, 기록적인 무더위 때문에 소위 '기후 우울증'에 가까운 증상을 앓았던 지라, 거의 집중을 못한 채 시간을 질질 끌기만 했다. 하여 최수진을 비롯해 본서의 제작에 관여한 많은 이들에게 민폐를 끼친 것이다. 어찌어찌 해설을 완성해 책에 싣기는 했지만 그 민폐를 상쇄할 만큼『점거당한 집』의 핵심을 잘 꼬집는 데엔 실패한 것 같다. 이에 최수진을 비롯, 이 책의 제작에 참여한 모든 분들께 감사와 사과를 동시에 표한다. 아래는 (박지리문학상의 주관사인) 사계절출판사의 책 소개 페이지 링크이다.
"그러니까 소설이란 근본적으로 난잡한 장소다. 기실 여기 『점거당한 집』에 수록된 세 편의 소설에서 최수진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바는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호기롭게 쓰고 나서 보니. 이 말 자체로는 당신께 딱히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이 왜 난잡하다는 것인가, 또 왜 소설을 장소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건 비유법인가? 아무래도 이 자리는 이를 해명하는 자리로 써야 할 성싶다.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 하여튼) 당신께서도 읽었듯이, 『점거당한 집』은 소위 ‘예술가 소설’ 즉 예술가를 서사의 주인공으로 삼는 일련의 소설군에 속하는 작품이다. [...] 하나 [...] 그것은 이 연작소설이 동시대 예술에 대한 소설이며, 나아가 예술의 동시대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이런 사실을 인류사에서 일찍이 미학적인 문제로 설정한 것은 바로 소설이었다. 영국 (반-)소설의 위대한 초석을 닦은 헨리 필딩은 그 초석인 『업둥이 톰 존스 이야기』를 두고 “산문-희극-서사적인 글쓰기(prosai-comi-epic writing)”라 썼는데, 이만큼 소설의 정체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말도 찾기 어려울 게다. 서사시는 중앙 집중화고 소설은 탈중심화라는, 미하일 바흐친의 저 유명한 이데올로기적 이분법을 따르지 않더라도, 묘사와 서술, 독백과 웅변, 희극과 비극 혹은 일기, 서한, 기사, 시, 교과서, 사전 등 여타의 온갖 담화 형식을 끌어들이고 뒤섞고 가공하며 발전한 소설은, ‘산문으로 쓰여진 서사’이기 이전에 고도로 잡종적이며 난잡한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프랑코 모레티가 “바흐친에게는 결례이지만 간단히 말해 근대 서구의 다성적인 형식은 소설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히 말해 서사시이다.”라고 지적하긴 했으나,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는 바는 일단 ‘매체’의 문제임을 짚고 넘어간다)"
"하나 유념하자, 소설이 원래 그런 것이었다고 해서 꼭 오늘날의 소설도 그래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이전의 미완의 임무를 당대에 걸맞은 모습으로 갱생하는 것이 어떤 뛰어난 예술작품들의 성취라는 것도. 그렇다면 어째서 최수진이 ‘동시대적’ 예술을 업으로 삼은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는지, 또 어째서 이메일과 기사와 각주 등 소설 바깥의 담화 형식들을 종종 난삽해 보일 만큼 적극적으로 사용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소설의 난잡함과 동시대 미술의 난잡함이 만나 격렬히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소설을 쓰려 한 것이리라. ‘근본적으로’ 난잡한 문학 장르인 소설과, '현재적으로' 난잡함을 갱신하는 미술이 서로를 자극하고 또 부상시키며 일어나는 소용돌이."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소설'과 '장소'는 동종의 문제를 갖게 된다. 소설은 어떤 장소인가? 앞서 장르 아닌 장르라 말했던 것을 조금 바꾸자면, 이는 장소 아닌 장소다. 그 자체로서만 성립 및 존속할 수 없는 난잡한 예술인 소설은, 예술가를 비롯한 인간 행위자에 의해 그 장소성의 변화를 겪는 『점거당한 집』의 장소들과 공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에 필요한 태도란 고유하고 고정된 예술이나 장소를 추구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게 애초에 늘 자명한 것이었냐고, 나아가 고유하거나 고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예술이나 장소가 성립될 수 없는 거냐고 집요하게 반문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최수진은 『점거당한 집』에서 이런 태도를 쭉 견지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소설이란 근본적으로 난잡한 장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