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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Nov 04. 2024

틈새의 시간, 되찾은 현재 - 양선형의 『말과 꿈』


(아래는 2023년 2월 10일 자음과모음에서 출간된 양선형의 소설집 『말과 꿈』에 수록되었던 해설 원고를 일부 수정 및 보완한 글이다. 여담이지만 본문은 『말과 꿈』에 수록된 에세이 「「말과 꿈」에 관한 소설」을 읽지 못한 상태에서 쓰였었다.)





적어도 남한에서 양선형처럼 ‘카르페 디엠’이란 구호에 어울리는 소설가는 없다. 당연하지만 이 말에는 어떤 조롱이나 우회의 뉘앙스도 없다. 정말 그렇다. 요즈음엔 ‘카르페 디엠’이 ‘YOLO’에 자리를 내준 낡은 말이 되었어도 그렇다. 다만 양선형이 이 구호를 유행시킨 <죽은 시인의 사회>를 봤는지 안 봤는지는 이런 생각과 아무 상관이 없는데, 그의 소설과 상관이 있는 건 <죽은 시인의 사회>가 아니라 이 구호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 말기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지은 송가의 한 구절, "현재를 잡아라, 내일은 가급적 믿지 말고(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한 번 헛상상을 해본다. 이 구절을 스스로의 문학에 있어 지침으로 삼아, 글쓰기가 지치거나 막막해질 때마다 “카르페 디엠”을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소설을 완성해가는 양선형을. 이런 헛상상이라도 가능은 할 만큼 양선형의 소설은 내일(혹은 어제)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며, 반대로 “현재를 잡”으려는 데에 더없이 열성적이다. 그리고 여기 『말과 꿈』에 실린 각각의 소설들은 현재에 대한 양선형의 열정을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육화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말과 꿈』은 현재의 소설가가 쓴 현재를 위한 소설집인 것이다.


양선형의 궤적을 착실히 따라온 당신이라면 바로 반문할 지 모르겠다. 양선형이야 말로 현재라는 시간의 개념을 잔뜩 일그러뜨리는 작가가 아닌가? 아무런 이야기적/상징적 계기 없이 갑자기 한참 동안 과거를 회상하고, 그런 회상들이 대과거부터 근과거까지 순서를 잘 지켜서 나오긴커녕 컷-업 테크닉(cut-up technique)으로 기술된 것 마냥 순서 없이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데다, 다음의 부분처럼 상상되는 중인 미래에서 또 상상이 이어지거나 상상이 당장 일어난 일인 것처럼 모호하게 서술되기도 한다.


"그는 왠지 모를 비애감 같은 것을 느꼈다. 짧게 요동치던 항공기가 지상에서 이탈하는 순간이었다. 활주로로 나갈 필요가 없어졌고, 그러나 그는 활주로를 질주하는 말 한 마리의 영혼을 본 것 같았으며, 포털사이트 화면이 먹통이 되었고, 일직선으로 뻗은 금속 날개가 엿가락처럼 구부러졌으며, 미사일에 격추된 유선형 동체의 허리가 찢어졌고, 공중을 유영하던 새들이 프로펠러 속에서 잔혹하게 파쇄되었으나 이 모든 일은 환영일 뿐이었다. 절대로 이런 일들이 벌어져서는 안 되었다."(「말과 꿈」 111쪽)


양선형을 읽을 때엔 내가 읽고 있는 문장의 시제는 물론이요 화자의 인식과 자리조차 온전히 믿을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가 붙잡으려는 현재란 요즈음의 현재주의(presentism)[1]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말하자면 그의 소설에서 현재는 불청객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집이요, 구멍이 뚫려 동전이 빠져나가는 ‘2018: 퇴거’의 외투 주머니다.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대신 한참을 우회하고 흔들리는 시간, 잠정적이고 불순한 시간. ‘시간이 흐른다’는 말을 듣는 순간 양선형은 미간을 찌푸릴지 모른다. 그는 스스로의 그런 성질을 건조한 어조로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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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험’에 있어 역사적 감각이 쇠퇴하고 현재만을 유일한 시간(성)으로 여기게 되는 작금의 흐름. 상세한 설명은 다음의 책을 참조하라. 더글러스 러시코프, 박종성, 장석훈 옮김, 『현재의 충격: 모든 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청림출판, 2014). ]]


"시간은 레이어를 만든다. 그것들은 격자처럼 반듯하지 않고 연꽃 모양의 프릴이나 수면 위로 퍼지는 동심원처럼 하늘거린다. 때때로 그것은 왜곡된 흔들림이다. 그러나 모든 흔들림은 확장되거나 통과하거나 침투하거나 사라지면서 새롭게 반복되는 흔들림의 궤적일 뿐 어떤 형상에 대한 왜곡으로 읽힐 수 없다.”(‘2024: 「퇴거」에 관한 소설’, 210쪽)


양선형이 지난 『감상 소설』(문학과지성사, 2018)과 『클로이의 무지개』(문학과지성사, 2022)에서 격렬한 형태로 보여준 (강보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어의 '탕진'은 현재의 이런 특성 아닌 특성과도 연관이 있다. 한데, 오히려 그렇기에 양선형이 현재를 잡으려는 데에 가장 치열한 소설가라면 어떨까? 현재를 잠정적이고 불순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야 말로 현재를 현재답게 만든다면? 이쯤 되니 아무래도 ‘현재’라는 낱말이 당신과 나 사이에 서로 다른 의미를 지시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양선형이 붙잡으려는 현재가 대체 무엇인지 차근차근 따져보자.


양선형은 앙투안 볼로딘과 다르다. 독자의 현실감각을 최대한으로 압박하려는 소설을 양선형은 아마 쓰지 않을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양선형의 소설에 흔히 붙는 '실험적'이란 관형사는 사실 그의 소설에 썩 어울리지 않는다. “작가는 초현실, 환상, 망상 속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을 따라가면서 실험하는 존재이며, 소설을, 예술을, 글쓰기를 실험하는 존재가 아니라, 글쓰기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실험됨을 감당하는 존재”[2]라는 강동호의 근사한 독해에 흠을 잡을 생각은 없지만, 그런 측면에서 양선형은 (주어진 질료를 생경한 조건에 배치한다는 의미에서) 실험적인 동시에 (손상된 조건을 주어진 질료로 재구성한다는 의미에서) 보수적(補修的)이기도 하기에 그의 설명은 절반의 진술로 그친다. 그런데 무엇에 대해 보수적이란 말인가? 개념으로서 ‘시간’이 그것이다.


물론 이 ‘시간’의 역사에 대해 이 자리에서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혹은 지면이) 그럴 수 없기도 하고, 당신도 흥미가 떨어질 터이니 말이다. 다만 크게 과거/현재/미래로 나뉘어지는 개념으로서 ‘시간’의 범주가 양선형을 숙고할 때 중요하다는 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쯤에서 이론 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가 최근에 내놓은 대중서적들을 떠올려본다. 그 중에서도 2017년 작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현재를 구성하는 데 있어 양선형의 방법론을 논하고자 할 때 큰 도움을 주는 책이다. 가령 다음의 구절을 곱씹어보자.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시간의 간격이 존재한다. (…) 이 간격은 현재의 확장이다."[3]


그 범주에 있어 과거나 미래는 전혀 미스터리하지 않다. 정말 미스터리한 것은 현재다. 당장 친구가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뭐 하고 있어?”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지금 어떤 일 A를 하고 있어”라고 자연스럽게 대답하리라. 그런데 당신이 “지금”이라는 말을 내뱉는 찰나에 A 혹은 A의 일부는 이미 근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된다. 또한 역으로 A 혹은 A의 일부는 근미래의 당신이 한 말에 의해 구분되고 ‘이름’을 부여받는다. (질 들뢰즈가 베르그송을 통해 말했듯) 시간이 매순간 현재와 과거로 이중화되는 것이다.[4] 그렇다면 현재는 대체 언제인가? 아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서로 나누어 범주화 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요컨대, 우리가 가진 물리법칙들은 체로선 시간의 방향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문득 ‘카르페 디엠’의 원천인 송가의 또 다른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가 떠드는 동안에도, 질투 많은 시간은 흘러간다네(Dum loquimur, fugerit invida aetas:).” 하지만 그 시간은 대체 어느 방향으로 흐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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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동호, 「불능의 시뮬라크르」, 『감상소설』 해설(문학과지성사, 2018), 394쪽.

[3] 카를로 로벨리, 이중원 옮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쌤앤파커스, 2019), 50쪽.

[4] 질 들뢰즈, 이정하 옮김, 『시네마 II: 시간-이미지』(시각과 언어, 2002), 195쪽. ]]


흐르는 시간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 자체가 모종의 속임수다. 그것도 ‘자연적’인 속임수. 카를로 로벨리는 이런 형이상학적 사변이 지난 세기 이래의 물리학적 탐구와 동떨어진 게 아님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현대 물리학의 성과 중 하나는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라고 로벨리는 말한다). 현재는 오직 과거와 미래를 직간접적으로 호명할 때에만 간신히 또 일시적으로 성립되는, 미스터리하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시간이다. 로벨리 말마따나 "두 사건 사이의 기간은 단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을 수 있다"[5]면, 그래서 베르그송 말마따나 현재야 말로 시간의 집합이라면, 사실 현재란 과거와 미래를 비롯한 수많은 시간대가 혼란스럽게 순환하고 뒤섞이고 있는 시간대일 테다. 다시 한 번, 잠정적이고 불순한 시간으로서의 현재.


이런 현재가 양선형의 언어로 번역/육화될 때, 그것은 디제시스에서 상황의 시작과 종결 사이에 진행 중인 시간대로 일단 설정된다. 「너구리 외교관」의 문이 열리는 순간까지의 대기, 「말과 꿈」의 ‘녀석’을 찾으러 공항으로 향하는 ‘그’의 여정, ‘2018: 퇴거’의 대리운전 알바를 하는 ‘나’의 방황. 열거하고 보니 이 각각의 현재들은 앞서 로벨리가 말한 “간격”과 모두 닮아 있지 않은가? 일종의 대기 시간이라 해도 좋을 이 “간격”이 말과 함께 자꾸 확장되면서, 그 사이로 상상과 회상이라는 가면을 덮어쓴 과거와 미래가 침투한다.


아무래도 양선형은 이런 현재의 성질을 “간격” 보다는 틈새라고 부르길 선호하는 듯하다. “나는 처음 소설을 발표했을 때부터 어떤 비좁은 공간의 틈새에서 울창하게 자생하는 굴절된 생각과 비뚤어진 환상의 풍요로운 생태계를 보여주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2024: 「퇴거」에 관한 소설’, 181쪽)는 대목을 염두에 두면 그렇다. 한데 시간의 침투와 뒤섞임을 치열하게 묘사하고는 있어도, 우리의 시간관이 속임수였다고 폭로할 생각이 양선형에게는 없다. 그의 소설에서 범람하는 문장들에 의해 디제시스나 장르적 구조가 아예 중단되고 붕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시간의 흐름 자체가 속임수라면, 양선형은 우리가 그 속임수에 자꾸만 걸려들고 나아가 예속된다는 데에 관심이 있다.


다시 로벨리로 돌아가자. 그는 우리들을 위해 ‘국소적 현재(Local Present)’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우주에 있어 객관적으로는 모든 사건과 역사 순환하고 뒤섞이며 시간을 이루고 있다 한들 몸과 정신의 주관성이라는 한계로 인해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그런 ‘인간적’인 느낌으로서의 현재를 비롯한 보편적 ‘시간’ 개념을 객관적/영원주의적 시간관과 양립 가능한 각자의 시간대로 엄연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마치 양선형을 위해 준비되고 제기된 것만 같다. 즉 임시변통이자 초월론적 가상으로서의 시간.


“엔트로피의 증가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고 우주의 전개를 이끈다. 또한 과거에 대한 흔적과 잔존물 그리고 기억이 존재하도록 한다. (...) 여기서 우리가 시간의 '흐름'이라 부르는 것이 탄생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의 경과를 경청할 때 듣는 소리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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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카를로 로벨리, 앞의 책, 200쪽.

[6] 카를로 로벨리, 앞의 책, 202쪽. ]]


양선형이 문장의 성질을 마구 교란시키는 와중에도 지시대명사(‘그’, ‘나’, ‘녀석’, ‘친구’ 등) 만큼은 늘 고집스럽게 이어가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는 ‘시간’ 개념의 해체가 아니라 그 해체된 ‘시간’ 개념을 내재하는 현재를 살기를 요구한다. 요컨대 양선형의 현재는 다른 시간대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의 시간이며, 다른 시간대와 함께 끊임없이 진행 중인 틈새로서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선형의 소설적 시간에는 크게 두 개의 힘이 펼쳐지고 있다. 현재에 몰입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시간의 침투를 허용하는 작용, 그리고 그 속에서도 가능할 진행 중인 현재를 갈구하는 반작용.


물론, 이렇게만 정리한다면 『말과 꿈』을 비롯한 양선형의 모든 소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 프루스트에 대한 오마주에 그칠 테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가 말했듯 “프루스트는 한편으로는 연대순을 흐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대순을 함부로 건드려 흩뜨리지 않으려고 고심한다. (…) 야우스Jauss의 표현을 빌리면, 시대착오적 순간들의 모자이크 이면에 “불가역적 시간의 정확한 시계”가 감추어져 있”[7]기 때문이다. 표현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 문장들은 앞서 나열한 수사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프루스트와 양선형을 좀 더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곧 이어지는 구절 역시 눈에 밟히리라. “소설의 끝에서 프루스트와 하나가 된 마르셀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앞의 자아들이 실은 자기가 부지불식간에 지나왔던 길의 단계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사후적으로, 그는 시간을 지나는 이 길에 종착지가 있었다는 사실, 이 길의 유일한 목표는 그에게 예술가가 되는 준비를 시켜주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8] 이것이 프루스트와 양선형 사이의 차이일까? 한데 안타깝게도 크라카우어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했다.


프루스트가 작품 전반에 걸쳐 치밀하게 구사하는 종속절의 문장은 각각의 이미지와 시제를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서 이를 통합할 모종의 초월론적 인식 주체의 현현을 예비하는 동시에 내파시킨다. 즉 서술자가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주인공 ‘마르셀’과 겹쳐질 때 그는 ‘징후들의 의미를 복원’(『되찾은 시간』)할 중대한 임무를 스스로에게 사후적으로 부과하지만(반작용), 그것은 작품 속 수십년의 세월 동안 거의 관찰자의 역할에 있던 스스로를 의심스럽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작용).


가령 『사라진 알베르틴』에서 왜 서술자는 ‘마르셀’이 알베르틴 이외의 정부(情婦) 몇 명을 두고 있었음을 굳이 지나가듯 언급하(고 그들과의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가? 또 ‘마르셀’이 어린 소녀에게 매춘을 의뢰했단 혐의를 받은 창피한 사건은 왜 파편적으로 던져준 뒤 구태여 서툴게 은폐하는 ‘척’을 하는가? 어쩌면 이 기나긴 이야기에서도 말해지지 않은 게 있진 않을까? 이런 의문을 자꾸 자극하며, 프루스트의 소설은 마지막까지도 소설적 시간(과 주체의 위상)에 얽힌 힘을 치밀하게 경합시키고 있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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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12, 178쪽.

[8]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앞의 책, 179쪽.

[9] 보다 자세한 분석은 이충민, 『통일성과 파편성 - 프루스트와 문학장르』(소나무, 2016), 제2부 제1장 「서술자의 신뢰성과 거짓말쟁이 역설」을 참조하라. ]]


한편 양선형의 주체는 사후적으로도 초월론적 인식의 자리에 가지 못하며, 앞서 예시를 든 것처럼 대개 처음부터 끝까지 현재의 현재성에 극도로 시달리며 살아간다. 시간은 소실점 없이 상황의 종결을 맞이할 뿐이다. 이런 전개를 한 번 (양선형이 실제로 그를 읽었는지 여부는 무시하고서) 프루스트에 대한 비판/비평(Critic)으로서의 ‘반복’으로 읽으면 어떨까? 요컨대 양선형의 소설적 시간에 있어 작용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그것을 (상대적으로 덜 치밀할 지 언정) 뚜렷하게 가시화하여 잇고 있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성취를 동시대의 언어적 장(場)에 걸맞은 방식으로 ‘상속’하기 위하여. 이런 작용의 구성에 대해선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을 것 같으니, 이제는 반작용의 구성에 대해 파고들어보자.


사실 틈새는 시간의 문제만이 아니다. 「말과 꿈」에서 '그'는 '녀석'의 실물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하며, 다른 누구의 경험담을 전해 듣거나 스마트폰에서 뉴스를 보는 방식으로 경험을 축적한다. 혹은 「너구리 외교관」의 문이라는 간격, 「「퇴거」와 나중에 함께 묶인 다른 산문들」에서 두 편의 소설 사이에 낀 에세이, 그리고 ‘2018: 퇴거’ 안에서 쓰이는 우회책으로서의 소설을 떠올려보자. 오해를 피하기 위해 약간 앞질러 말하자면, 양선형의 주체들은 실재의 행위성을 포기한 소극적 주체가 아니다. (냉소/유희/생존/거리감 등의 어구로 표현되곤 하는) 청년 세대론에 따른 ‘왜소한 주체’란 비평적 틀이 이제는 철저히 거부당했다면[10], 당장 우리가 손에 쥔 소설을 그 틀에 막연히 집어넣는 것 역시도 철저히 거부해야 할 테다. 그 대신 다음의 구절에서 양선형의 행위성에 대한 단서를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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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민경환, 「풍경을 다시 크롭하기 2」, 《문장 웹진》 2020년 8월호. ]]


"그는 까막잡기를 하듯 양손을 더듬거린다. 그가 포옹하면 녀석은 생겨난다. 그런데 어디있어. 너 어디있어."(「말과 꿈」, 35쪽)


이 문장들을 현상에 대한 묘사로 곧장 읽는다면, 양선형에 있어 행위가 지닌 위상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다. ‘그’의 몸짓으로 ‘녀석’은 생겨나지만 동시에 여기 없기도 하다. 즉 포옹으로 인해 생겨난 ‘녀석’은 ‘녀석’의 일부이면서 ‘녀석’이 아니기도 하고 ‘녀석’이기도 하다. 지난 「클로이의 무지개」의 복합적인 레이어를 연상시키는 모순 앞에서 우리는 문득 문학의 영토 바깥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토마스 허쉬혼의 저 악명 높은 영상작업 <Touching Reality>(2014)의 손짓, 즉 태블릿 PC의 화면에 뜨는 참상의 이미지들을 (말 그대로) 쓰다듬고 어루만지면서 수많은 맥락과 가능성을 한데 뒤집어쓰는 그 손짓과 ‘그’의 몸짓은 공명하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한계 속에서 이뤄지는 관계 자체의 관계성.


(포스트-)칸트 식으로 말해보자. 자기의 인식과 자기 밖의 세계 사이의 완전한 합치는 불가능하나, 그런 경우에도 이미 나와 세계는 지각의 층위에서 '관련'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진리에 연관되어 있다.[11] 즉 한계는 모든 가능성을 무(無)로 돌려놓는 대신 자기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버스의 창문이 차창 밖의 풍경을 안전하게 보여주면서 우리의 모습을 약간 비추기도 하고 그 자체도 구경의 대상이 될 수 있듯이. 양선형의 경우라면 초월론적 인식 주체의 실패를 증언하면서, 그 실패 자체가 행위가 되고 관계를 창출하는 순간을 쓴다. 앞선 구절의 내용은 상상과 회상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상상과 회상을 현재의 일부로 삼아 그 가면을 더듬거리는 광경인 것이다. 양선형의 주체들의 행위성은 오직 한계에서 찾아야한다. 그리고 오늘날 낡고 흔한 수사가 된 '(불)가능성'은 바로 이런 식으로 갱생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한계 속으로 주체를 끌어당기는 걸까? 양선형의 주체들은 (캐릭터라고 하기도 어려운) 어떤 대상들을 강박에 가깝게 의식하며, 바로 그로 인해 내러티브가 촉발된다. 도달점에 가까운 이들을 일단은 의식의 대상이라고 하자. 한데 바로 이 점에서 양선형의 다른 소설집들과 『말과 꿈』은 결정적으로 갈라서는데, 『말과 꿈』에 수록된 작품들의 주체는 무엇보다도 대상이 귀여워서 의식하기 때문이다. 전작 「거위와 인육」에서 “의뢰인인 허풍쟁이 악마의 의뢰를 통해 의뢰의 표적이기도 한 허풍쟁이 악마를 추적하는 것이 허풍쟁이 악마와 체결한 계약의 내용이었”[12]던 것과 비교하면, 「말과 꿈」에서 ‘녀석’의 외양에 대한 세세하고 감각적인 묘사나 ‘2022: 지난 계절의 일기’에서 '서이제'에 대한 ‘모에화’는 적잖이 이색적이다. ‘2018: 퇴거’의 ‘나’가 고백하듯, 주체들은 의식의 대상에 대해 말 그대로 사랑에 빠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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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박수범, 「칸트 진리론의 구조(構造)」, 《범한철학》 제75집(2014), 208쪽

[12] 양선형, 「거위와 인육」, 『클로이의 무지개』(문학과지성사, 2022), 75~76쪽. ]]


한 편의 동화 같은 「너구리 외교관」에서 이런 구도는 특히 노골적이다. 방황하던 과거와 집 안으로 들어가는 미래 사이의 틈새로서 현재, 그리고 그 현재를 지탱하면서 동시에 붕괴시키려는 귀여운 너구리들. "야산에 거주하는 모든 존재가 너구리들을 귀여워한다"거나 "너구리 전령이 엉덩이를 흔들며 촛불 관리인 주위를 얼쩡거린다. 촛불 관리인은 그만 너구리 전령의 모습에 유혹되고 만다"는 문장들은 대상의 위상과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말과 꿈』 전반에서 귀여움은 주체의 (불)가능한 행위를 야기해 현재가 구성되고 진행되도록 하고 있다. 양선형은 주체가 대상을 의식하게 되는 여러 방법을 시도해보려는 걸까?


그런데 여전히 혼란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의식의 대상은 ‘2018: 퇴거’의 ‘나’에게 있어 “나는 내가 친구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한 것처럼 가까스로 현재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목적인가, 아니면 「말과 꿈」의 주인공에게 있어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약속이 아니라 약속이 성립되었다는 사실 자체”였을 지 모르는 것처럼 동원된 수단인가? 이도 아니면 양자를 때에 따라 오가는가?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화자를 우리라고 해서 믿을 수 있을까?) 해설을 읽고 있는 당신께는 죄송하지만 내게도 아직 확신이 없다. 하지만 이 독해들을 모두 허락하면서 거부하는 듯이 모호한 스탠스가 양선형의 텍스트가 지닌 매력 중 하나긴 하다(라고 얍삽하게 탈출구를 만들어 본다).


하여튼 이런 와중에도 명확한 건, 여기서 ('귀여워 함'으로서) 의식의 대상은 내러티브를 포함해 잠정적이고 불순한 시간으로서의 현재를 촉발시키면서 그것을 하여튼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최소한의 연속성을 야기하는 이중적 기제란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말과 꿈』에 실린 각각의 작품들은 현재라는 틈새가 유지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각각의 사고실험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2024: 「퇴거」에 관한 소설’은 이 소설집에서, 나아가 양선형의 궤적에서 가장 유별나고 충격적인 작품이라 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틈새 없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퇴거」에서 소설로나 상상되고 쓰이던 ‘친구’의 퇴거가 정말로 일어나버렸다. 달리 말해, 상상의 형태로 우회 및 지연시키던 미래가 현재를 정말로 엄습하고 점령해버렸다. 양선형의 소설 대부분이 미래의 도래 혹은 현재의 마지막 연장으로 끝나는 것과 달리 ‘2024: 「퇴거」에 관한 소설’은 거기서 (뒤늦게) 시작한다. 게다가 이 작품의 문체와 전개는 한때 우리의 이목을 주목시켰던 오토픽션을 너무 닮지 않았는가. 이전에 양선형이 직접 시도해본 적 없는 소설 장르. (저자의 심상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듯한’ 전개에도 어째서 제목에 “수필”이 아닌 “소설”이 붙었을까?) 요컨대 이 단편은 양선형 자신의 문학적 지침들을 일부러 이탈한 예외작인 것이다.


이런 예외적 조건들 속에서 ‘나’는 ‘친구’를 대신해 폐인이 됐(었)다. 귀여움의 대상이 없다면 현재도 불가능하며 그렇기에 시간과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 앞선 ‘2018: 퇴거’에서도 자기혐오적 태도를 몇 차례 마주할 수 있었지만, ‘2024: 「퇴거」에 관한 소설’은 모든 페이지를 채운 회상과 독백이 거의 절망의 언어뿐이란 점에서 훨씬 힘겹다. 자기모독을 과잉 전시하며 또 그런 자신을 의심하고 모독하는 순환 구도는 마치 “스스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견딜 수 없는 불안에 대항해 자아를 신체적 현실 안에 확고히 근거하게 하려는 시도”[13]로서, 곧 극단적인 자기확인으로서 자해처럼 느껴지기도 해 위태로움을 더한다.


즉 현재라는 틈새로 겨우겨우 저항하던 미래의 무게가 한 번에 쏟아지는 광경이 ‘2024: 「퇴거」에 관한 소설’에서 펼쳐지고 있다. 빗속의 친구를 회상하는 장면은 그 이색적으로 선명한 묘사 때문에 상쾌한 분위기를 잠시 자아내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다시 절망 속에 중얼거린다. 아직도 현재 없는 미래만이 여기 있기 때문이리라. 고정된 자리와 고정된 시간에서 (적어도 양선형 자신의) 주체에게 가능한 소설이란 없다고, “자기 자신의 실험됨을 감당”하는 양선형은 ‘나’의 절망의 언어로 말한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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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슬라보예 지젝, 김희진, 이현우 옮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9.11테러 이후의 세계』(자음과모음, 2011), 23쪽.

[14] 이런 맥락에서 이 소설은 오토픽션 논의에 대한 양선형의 비판적 개입으로서의 리메이크처럼 보이기도 한다. 강동호와 민경환의 지적처럼 모든 시제롤 종합하고 정리하는 리얼리즘-소설적 주체의 대안적(내지는 대결적) '재'구축으로 최근의 ‘1인칭’ 담론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얼마나 양선형의 문학과 차이를 갖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2024: 「퇴거」에 관한 소설’의 또 다른 대목을 곱씹어보자. "나는 친구의 머릿속에서 다녀가는 어떤 의식의 흐름이 친구에게 크나큰 슬픔을 유발하는 동인으로 작용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나는 알아야만 해. 나는 흐리고 틀렸기 때문이다. 나는 알아야만 한다. 조금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알아야만 해. 느낀다는 것은 허약했다."(184~185쪽) ]]


그러나 이 작품을 진정 유별나고 충격적으로 만드는 것은 절망만이 아니다. 현재 없는 소설 같은 건 아무래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현재성의 삶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겠다는 듯이, 끈적하게 들러붙은 절망을 넘어 양선형은 마지막 세 문단에서 인용과 가정법의 형태로 미래시제를 다시 불러들인다. 도래했던 미래가 마침내 과거로 물러나 순환과 교란이 미약하게나마 시작되고, 틈새의 시간으로서 현재가 조금씩 부활한다. ‘나’의 조심스런 어조에도 불구하고 이 세 문단이 굳건하고 희망적으로 느껴진다면 바로 이 때문이리라. 그중 마지막 문단의 일부를 좀 길게 발췌해보자.


“나는 친구의 집들이에 과일이나 화분을 사서 방문하는 하루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맥주를 마시는 하루에 대해, 친구의 집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을 하면서 눌러앉아 있는 하루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왜 끝나지 않고 연속되는지, 친구에 관해 서술하지 않은 것들이 담긴 주머니가 여전히 불룩하다는 사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이야기들이 아득하고 터무니없이 느껴진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쓸 수 있는 어떤 날을 향해 나아간다. 그동안 나는 지금처럼 내가 쓰지 못한 것들을 미래 시제의 약속으로 남겨둘 수 있을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그리워하면서 말이다.”(210~211쪽)


이젠 분명해졌을 테다, 『말과 꿈』은 현재의 현재성이 현재주의 속에서 잠식되는 오늘날에 걸맞은 방식으로 현재를 잡으려 하는 필사의 문학적 시도다. 다시 한 번, 현재와 대상의 관계는 규정하기 애매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양선형 소설의 매력 중 하나다. 그 애매함이 야기하는 지속적인 의문과 탐색에 대해 ‘그럼에도’가 아닌 ‘그렇기에’라고 말하도록 소설이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래, 현재를 잡아야 한다. 다만 그 현재란 지극히 잠정적이고 불순한, 틈새로서의 시간임을 명심하면서. 말과 꿈을 읽고 나면 ‘카르페 디엠’을 예전과 같은 글꼴이나 발음으로 인식하고 표현할 수 없을 테다. 세상을 낯설게 느끼도록 할 뿐 아니라 세상의 낯선 모습을 긍정하게끔 만드는 것, 그것이 예술의 탁월한 역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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