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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Feb 08. 2019

밥 먹었니, 라는 말

순대국밥을 좋아하는 이유 


 


 '밥 먹었니' 라는 인사는 나에게는 유난히 따뜻하고도 아픈 말이었다. 29살의 10월 17일을 잊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그 인사와 이어져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호주에서 해왔던 3년 간의 일들이 끝난 후 나는 한국에 돌아와 다음 업무를 앞두고 쉼표를 찍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가을날, 자주 가던 카페에서 이력서를 쓰다가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일을 당하고 말았다. 오늘은 곳곳에서 쉬이 찾아볼 수 있는 보이스피싱이라는 사기를 그 시절의 어리숙한 내가 당하고 만 것이다. 황당한 뉴스가 나에게 현실이 되어버린 광경을 바라보면서 망연자실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열정페이로 일하며 모아둔 돈도 없는 내가 사기 당할 돈이 어디있었겠냐만 나에게는 호주로 떠나기 전 엄마가 궁여지책으로 빌려주신 전세 자금이라는 돈이 있었다. 그 돈을 잊고 살았다면 정말이지 감사할 노릇이었겠지만 그 돈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한 덕분에 나는 그 범죄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인생은 가난한 나를 정말 낭떠러지 끝까지 밀어 넣고서야 운명의 장난을 멈추었다. 


 보이스피싱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엔 털 끝만큼의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이기적인 내가 받게 된 가장 무겁고도 큰 벌이었다. 인신 매매를 당하지 않은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몇 번이고 위로했지만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에게도 이 것은 큰 충격이었는지 그 날 경찰서로 향하는 내 곁에서 모두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뉴스에서만 흘러나오는 일이 가장 가까운 친구의 불행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모두 이렇다 할 위로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배도 고프지 않았고 무엇보다 밭에서 나물을 떼다 팔아 어렵게 모은 돈을 병신처럼 하루 아침에 날려 버린 내 자신에 대한 자책감에 미치지 않고선 견디지 못하는 심정이 되었다. 흔히 ‘남의 일’ 이라고 부르던 것들이 내 삶에 찾아와 현실이 되었을 때, 그제서야 나는 삶의 차가운 단면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영화같은 일이었다. 그것도 눈물없이 차마 끝까지 볼수 없는 종류의 영화 말이다. 가난뱅이였지만 사실 마지막까지 내가 믿고 있던 한 줌의 지푸라기가 바로 엄마의 눈물젖은 돈이었는데 나는 그 마지막 잎새를 떠나보내고 희망까지 몽땅 잃은 것이었다. 사람이 바닥 끝까지 추락하면 실성을 하고 만다는 것을 나는 생일을 앞두고 부산 남포동의 어느 농협 앞에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길거리에서 세상을 잃은 것처럼 소리 지르고 있었다. 마른 울음이 났다. 슬픔을 뛰어넘은 경지에 이르면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울 수 있다는 것을 난생 처음 깨달았다. 



 나는 그제서야 낮고 차가운 곳에 발을 딛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해왔던 바닥이라는 곳은 진짜 바닥이 아니었다는 것을 위를 바라보며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날이 되기 전까지도 나조차도 알지 못한 교만함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 하나의 삶을 책임지기에도 벅차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던 나에게 삶은 아주 큰 꾸중을 했다. 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호주로 무작정 떠나버린 죄값이며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갈 책임의 무게였고 또 서른이 되기 전 맛 본 진짜배기 100% 리얼 성장통이었다. 무일푼으로 한국에 돌아와 볼품없어 보이기만 했던 나는 이제 진짜 발가 벗겨진 채였다. 나에게 벌어진 일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 일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이 매일 치열하게 싸웠다. 엄마가 기워 준 양말 한 켤레, 아빠의 깊게 패인 이마의 주름이 떠올랐던 건 부모님이 아끼고 아껴가며 모아 주신 돈을 모두 잃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돈을 몽땅 잃은 다음 날은 마침 남자친구를 부모님께 처음 소개하는 날이었다. 한정식 집에서 내 앞에 놓인 수십가지의 반찬들을 기계처럼 입 속으로 밀어 넣었지만 부모님이 할머니를 모셔다 드리겠다며 떠나시자마자 나는 길 귀퉁이에서 먹은 것들을 게워내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익숙한 고향을 떠나있기로 마음 먹었다. 부모님 곁에서 차마 오래 머물지 못했던 것은 여전히 열심히 살고 계시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무척이나 죄스러운 이유에서였고 오랜 시간동안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았던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 때문이기도 했다. 겉으로 웃고 있는 모습과는 무척이나 대조적이게도 내 속은 점점 까맣게 썩어가고 있었다. 먹은 것들을 게워 내거나 불현듯 눈물이 터져 나오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런 나의 사정을 알게 된 가까운 주변 사람들은 오랫동안 내 곁을 지키며 눈물이 그치기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눈물이 조금씩 말라가던 어느 날, 겨우 일어선 나에게 그들이 건낸 인사는 쌩뚱맞게도 ‘밥은 먹었어?’라는 한 마디였다. '괜찮아?'라는 말 대신 마주하게 된 '밥 먹었어?'라는 인사는 내 앞에 놓인 순대국밥만큼이나 따뜻하고도 다정했다. 그 짧은 인사가 나를 먹먹하게 만드는 것은 ‘밥 먹었냐’는 인사에는 끼니를 제 때 챙겨 먹고 다닐 만큼 무탈하냐는 의미와 함께, 그리웠다는 안부가 그리고 힘내라는 격려가 묻어 있다는 것을 힘든 시간들을 겪어내며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오래 방황하고 있던 그때 사람들이 나에게 건낸 것은 그저 한 끼의 식사가 아니라 나라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치열한 삶에 대한 위로였다는 것을 조심스레 떠올렸다. 결국, 그들이 나에게 묻던 ‘밥 먹었니’라는 인사는 설익은 안부가 아닌 어른이 건낼 수 있는 가장 큰 위로 라는 것을 순대 국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로 5번의 생일이 흘렀다. 여전히 나는 마음이 허기지는 날이면 순대국밥이라는 단어가 적힌 간판을 찾아 들어가곤 한다. 따뜻한 순대 국밥 한 그릇과 깍두기 한 접시, 서러움과 함께 삼키던 그 뽀얀 국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물과 함께 국밥을 뜨던 내 곁을 오래도록 지켜준 누군가의 체온이 떠올라서 나는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싶은 마음을 다시금 다독거리게 된다.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되찾은 것도 마음이 온전히 치유된 것도 아니지만 오늘의 나는 그때의 나보다 더 힘든 시간을 겪어내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인사를 건낼 수 있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이따금 흐린 얼굴로 앉아 있는 누군가를 보면 나는 종종 ‘밥 먹었냐’는 안부를 건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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