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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Jul 24. 2019

결핍은 나의 힘

그 시절, 나에게 주어진 결핍은 불안만큼이나 나의 좋은 동력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할 때면 언제나 2호선을 타고 한강을 건넌다. 강변에서부터 시작되거나 끝나는 그 잠깐의 여행은 나의 하루가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았어'라는 생각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에 나는 그 짧지 않은 한 구간의 여정을 위해 핸드폰을 손에 쥐고 플레이리스트를 미리 준비해둔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이를테면 To find you라던지, Supermarket Flower처럼 잠시 감성에 젖어들 수 있는 노래가 있다면 더욱 그 여행의 감동은 배가 된다. 이 짧은 여행은 2,000원도 채 안 되는 돈으로도 가능한데 말 그대로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여정이 아닐 수 없다. 이따금 창 밖으로 오랫동안 향해있는 나의 지긋한 시선이 궁금해진 누군가는 시선의 끝을 따라 나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곤 한다. 그럴 때면 아주 부드럽고 연약한 내 은밀한 감정을 그 사람과 나누게 된 것 같아 조금은 기꺼운 마음이 된다. 핸드폰을 보느라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고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중요한 것들을 보기 위해 이 아름다운 여정을 놓치고 마는 것일까. 


 해가 지거나 뜨는 한강을 바라볼 때면 일상에 치여 잊고 있던 감정들이 떠오른다. 이 짧은 여행을 내가 탐닉하게 된 것은 바로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리게 해주는 순기능 때문이다. 그것의 주된 주제는 나를 만들어준 경험들에 대한 것인데 이따금 그 쉽지 않았던 시간들을 떠올릴 때면 나는 자꾸만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 무척이나 여리고 작았던 내가 지금의 존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 시절의 나에게 결핍을 주었던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23살에야 비로소 해외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요즘이면 그보다 조금 일찍 가까운 일본이나 방콕 혹은 가족들과 가까운 나라로 어렵지 않게 여행을 떠나곤 하지만 88년생의 청춘은, 더욱이 소를 키우며 농사를 짓는 마을에서 자란 우리 가족에게 해외라는 곳은 멀고도 어려운 장소였다. 넉넉한 형편도 그렇다고 아주 부족하지도 않은 시골에 지내며 나는 4살 터울의 동생을 위해 국립대에 들어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 착실한(?) 축의 학생이었다. 해외를 일찍부터 꿈꿔왔지만 주변의 다른 친구들처럼 휴학을 하고 유학을 갈 만큼의 형편이 되지 못했고 학교에서 이따금 추천을 통해 보내는 교환 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하기에는 토익 점수가 너무나 볼품 없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낸다는 말에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22살에 휴학을 하고 홀로 서울로 올라와 토익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기준점수를 맞춰서 돌아오면 교환학생에 지원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10개월이 다 되어 가도록 300점에서 시작한 토익은 780점을 기점으로 더는 오르지 않았고 나는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엄마의 수술 소식을 듣고 모든 짐을 챙겨 고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수술과 넉넉하지 않은 형편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꿈 때문에 나는 자주 숨어서 울었고 이따금은 책 속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쉽게 무너질 수 없었던 것은 그 어두운 방에서 나를 꺼내 준 친구들의 끊임없는 연락 때문이었다. 그들은 미국 디즈니랜드로 향하는 인턴십 공고를 보자마자 나에게 연락을 해왔고 나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 기회에 지원했다. 해외에서 돈을 벌며 자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명성에 걸맞게 디즈니 인턴프로그램에는 해외 교환학생이나 호주 워킹홀리데이 출신이 많았고 나는 그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의 부족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1,2차로 구성된 영어 인터뷰를 위해 A4용지 두 장 분량의 자기소개를 혹독하게 외웠다. 태어나서 가장 치열했던 시간들이었을 거라고 감히 생각할 수 있을법한 경험이었다. 아마 그때의 내가 인터뷰에 합격하지 못했더라면 그 이후의 호주도, 산티아고 순례길도 나는 분명 포기했을 것이라고 이따금 생각하곤 한다. 130번이 넘게 연습했던 자기소개를 씩씩하게 해냈지만 디즈니에서 온 인사 담당자가 묻는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엉뚱한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 후 내가 용감하게 펼친 2절지의 포트폴리오는 그녀가 내 열정을 높이사는 계기가 되어 내 두 손에 미국행 티켓을 쥐어 주었다. 미국의 최남단 플로리다에서 보낸 그 어느 날도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란 없었다. 영어를 잘 하진 못했지만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해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매일 인사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술자리에도 어울리게 되었고 나는 그들 중 유일한 동양인으로 미국인들 사이에서 귀여움(?)을 담당하는 사람이 되었다. 10kg의 무게를 얻는 동안 친구들은 언제나 나에게 '귀엽다'거나 '예쁘다'는 말을 쉴새없이 해주었고 나는 근거없는 자신감을 탑재한 채 인턴십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또 다른 나라에서의 삶을 계획했고 운 좋게 국가에서 보내주는 해외 인턴십의 기회를 얻었다. 어설픈 내가 국가 인턴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가진건 없지만 근거없는 자신감을 적극적으로 어필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국가 인턴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 쥐꼬리만 한 월급과 부조리한 대우 그리고 임금 체불이라는 현실들이 숨어있었다. 그 때의 현실들은 그리 돌이키고 싶은 기억은 아니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다음 목표가 있었기에 나는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대응하며 싸우고 무릎을 털고 일어나 다음 스텝을 위해 걸어나갈 수 있었다. 


 국가인턴의 지옥에서 벗어난 뒤 나에게는 6개월이라는 비자 상황이 허락되었다. 남들에게는 쉬워 보이는 구직이 유독 나에게는 어려웠다. 몇 날 며칠동안 이력서를 돌리며 시내의 음식점과 카페들을 무한정으로 찾아다니며 "당신의 매니저를 만날 수 있나요?"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무한반복 중이었다. 일주일쯤 이력서를 돌렸을 때 나는 기적처럼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샐러드바에서 키친핸드 역할을 부여 받았다. 남들에 뒤지지 않는 체력이었지만 무거운 솥, 프라이팬, 식기류 등을 씻는 일은 무척이나 고된 노동이었다. 더군다나 점심시간에만 반짝 바쁜 점심 장사 가게들은 가장 바쁜 시간대에만 나를 고용했는데 하루 4시간, 주 5일을 근무하고 나면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음식점에서 일하는 댓가로 매일 남은 샐러드를 챙겨 올 수 있었지만 대신 익숙하지 않은 기름 냄새와 오일 드레싱을 씻어내기 위해서는 매일 뜨거운 세제 연기를 온 몸으로 맞아가며 청소를 해야했다. 남은 샐러드와 입에 맞지 않는 호박당근스프를 먹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곳에서 샐러드나 먹고 청소를 하며 6개월을 보내고 돌아갈 것인가, 처음 이 곳에 오면서 다짐한 꿈을 위해 다시 차가운 길바닥에 나설 것인가를 말이다. 



 다음 스텝이었던 산티아고에 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300만원의 돈을 벌어야했다. 샐러드 가게에서 일한 돈으로는 집 값과 당장의 생활비를 충당하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이 없었다. 나는 무식하고 또 용감하게 다시 차가운 구직 현장으로 뛰어 들었고 이번엔 운이 좋게도 한인잡(한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반 시급보단 조금 적게 받고 하는 일*)을 구하게 되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베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일이었다. 사장님이 한국분인 관계로 나는 호주 월급보다 더 적은 돈을 받고 일을 했지만 사장님은 내 열정을 믿고 일주일 중 주 7일의 시간표를 나에게 선물해 주셨다. 세상에 이런 감사한 일이 있다니. 나는 일주일에 7일을 일했지만 나는 그 시간들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꾼이기도 했다. 3불의 차비를 아끼기 위해 매일 아침 집에서 일터까지 4km를 걸었고 일이 끝나면 다시 4km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니 돈을 쓸 일이 많지 않았고 사장님 대신 가게를 보며 가게 운영에 대한 감을 익히기도 했다. 자주 오는 단골 손님과는 가까워져 집으로 초대 받기도 했고 아들도 소개받았으며 덕분에 호주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조금 더 가까이서 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 삯이 모였다. 비행기 티켓을 용기 있게 지르고나니 더 악착같이 다음 스텝을 위해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호주에서 떠난 직후 나는 그렇게도 꿈꾸던 산티아고 길 위에 있었다. 결핍을 동력으로 살던 나에게는 조금의 기회들도 늘 악착같이 붙잡아야 하는 무엇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그 날 이후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되었다. 나는 불안과 결핍을 동력으로 비행을 할 수 있을만큼 나도 모르는 새 훌쩍 성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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