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서도 착한사람 컴플렉스

에스테야 - 산솔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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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에는 에스테야 알베르게에서 이틀을 꼬박 머물렀던 H와 S를 만나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저녁을 먹고 홀로 구석진 의자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는데 터벅터벅 걸어오던 H는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지만 (물론 나이를 처음엔 알지 못해 오빠라고 생각했을만큼 성숙했다) 생각은 훨씬 성숙했다. 긴 대화는 아니지만 짧은 대화 끝에 알 수 없는 여운이 잔잔하게 꼬리를 남겼다. 재미있는 친구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 배낭을 꾸리는 동안 아픈 발을 조금 절뚝거리며 H는 배낭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도 조금 앞서 혼자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난 밤, 우리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Daniel이 몇 번이나 함께 걷자고 제안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몇 번이나 깨워주어야하나 말아야하나를 고민하다 배낭을 메고 떠나려는데 어젯밤 함께 밥을 먹었던 J가 나에게 말했다.


"언니, 그래도 어제 몇 번이나 같이 가자고 말했었는데 깨워는 주고 가야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불편한 순례길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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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한국으로 돌아가 무슨 일을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길이 무척이나 걷고 싶어 호주에서부터 이 길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옆에 앉아있던 친구들 중 독일에서 온 Daniel이 자기네 회사를 소개시켜 주고 싶다며 휴가임에도 불구하고 친히 회사에 이메일을 보내 공석을 알아봤던 노고를 생각하면 나는 그와 함께 걸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워낙 친절에 약한 나로써는 신세를 지고 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배낭을 둘러 매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J의 권유로 나는 Daniel을 깨웠고 서둘러 떠나려했지만 세수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나를 따라 나서려는 그를 보며 결국은 백기를 들었다.


'그래, 아침에 잠시 함께 걷다가 오후에는 따로 걸으면 되겠지.'


물론 그 생각은 온전히 '나만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와 나는 무시무시한 밤을 함께 보낼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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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많은 순례자들이 학수고대하는 곳을 지나게 된다. 바로 와인이 흘러나오는 수도꼭지가 자리하는 이라체 수도원. 이 곳은 언제나 많은 순례자들로 가득하다. 수도원에서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포도주가 언제나 수도꼭지를 열면 흘러 나오기 때문이다. 물병 하나를 와인으로 가득 채워 길을 걷는 내내 마시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도 아침 8시에 말이다.


드디어 도착한 이라체 수도원,


한 쪽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다른 한쪽에서는 레드와인이 쪼르륵 흘러 나온다. 그나저나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탓에 사실 실망을 해버리고 말았다. 쪼르륵 참새 눈물만큼 나오는 바람에 물병에 채워가기엔 너무나도 눈치가 보이는 상황인지라 Daniel이 건내주는 컵에 담긴 와인만 넉살 좋게 받아 마셨다. 이 길을 성스러운 마음으로 걸었던 사람들은 이 와인 한 방울조차 감사하며 받아 마셨을텐데 나는 조금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잠시 자기 반성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조금 쌀쌀한 날씨지만 적당한 취기로 온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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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로스아르코스까지 17.4km 거리를 잠시 고민했지만 취기가 올라 발의 감각을 잊게 되어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Daniel과 이 길을 걷게 된 이유, 이 곳에 오기 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걷고 있는데 몇 번이나 알베르게에서 함께 식사를 하거나 잠자리를 했던 J와 T오빠가 뒤를 바짝 따라오며 나를 슬며시 놀렸다. 그들은 어젯 밤부터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Daniel의 사심을 이미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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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지나는 오솔길 그리고 그 곁을 짙은 선명함으로 채워주는 양귀비는 5월의 순례길을 수놓는 풍경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푸른 밀 밭을 생각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5월의 순례길을 걷는 행복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길을 걸으며 Daniel은 '철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기가 살던 곳에 있던 돌을 들고와서 산티아고로 떠나기 전 매일 머리 맡에 두고 자면 고민들이 그 돌에 깃들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돌을 산티아고를 걷는 내내 함께 들고 다니다가 철의 십자가에 두고 오면 그 케케묵은 고민들을 산티아고의 상징적인 십자가가 대신 짊어져준다고 말이다. 산티아고에 대한 준비라고는 체력뿐이었던 나에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에게는 이미 두번째 카미노인 이 길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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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의 두 번째 카미노.

가족들과 함께 왔지만 이번엔 더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삶을 나누고 싶어서 따로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같은 길 위에서 서로 같은 시간을 걷고 다른 생각을 하며 매일을 걷고 있겠지. 그리고 이 길이 끝나면 산티아고 대 성당이 보이는 어딘가에서 서로가 마주했던 풍경들을 함께 나누게 되리라. 그들이 채워갈 산티아고 길은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로 채워지게 될지 생각만해도 두근거렸다.



그는 이미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었다.

2년 전, 이 길을 걸었을 때 그는 대성당 앞에서 너무나 애처롭게 울고 있던 한 여자를 기억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온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눈물이 너무나도 슬퍼서 쉽게 잊을 수 없었는데 그 덕분에 한국이라는 나라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잠시 혼자 울고 있던 그녀의 곁에 머무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생각만으로, 어쩌면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생각 만으로도 가끔은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으니까.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아졌을지도 모른다고 나 홀로 위로했지만 아마 그녀는 내 걱정보다 훨씬 더 잘지내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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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뒷모습을 오랫동안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걷다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 잡았을 때 '올라'하고 자연스레 인사를 건냈다. 부부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무척이나 닮은 모녀였다. 다리가 아픈 어머니는 배낭을 메고 걸을 수가 없어 택시 서비스를 이용해 다음 마을까지 배낭을 보냈고 딸은 씩씩하게 배낭을 메고 걷고 있었다. 길을 걸을 수 있을만큼 건강한 어머니 그리고 그런 어머니와 함께 길을 걸을 여유가 있는 딸의 모습은 오늘의 내가 무척이나 부러워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이 많을 때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고, 경제적인 여유가 허락될 때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아이러니한 삶을 살아가다보면 결국엔 나이든 부모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텐데 우리는 자주 어리석은 선택의 반복을 하곤한다. 두고온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하루에 한번은 뜨거워지는데 그 것은 아마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내 눈은 자꾸만 그들을 따라 길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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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벗어놓은 배낭 곁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너무나 다정한 배낭을 보고 있노라니 주인의 온기가 여전히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다. 인생의 뜨거운 시절을 모두 보내고 다시 2막을 준비하기 위해 이 길 위에 선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같은 가방을 메고, 같은 우비를 입고 때론 손을 잡고서. 웃고 있는 그들의 웃음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길을 걷는 부부들의 미소와 그 눈가의 주름은 대게 서로를 깊이 닮아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며 그들의 웃는 모습을 닮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건 그 미소에서 느껴지는 삶의 '깊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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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바람이 대단한 곳을 지났다.

매일매일 그 날의 기분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며 기록으로 남기곤 했는데 이 길을 걸으며 남겼던 영상에는 내 목소리보다 더 힘찬 바람소리가 가득 담겨 있어 그 길을 걷는 내 기분을 알아 차리긴 어려웠다. 앞서 걷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노라면 안도감이 든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 눈을 감으니 지난 5년이라는 시간동안 눈을 감고 이 길을 걷는 내 모습을 상상하던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눈을 감을 때마다 때론 너무나 이 곳이 간절해져서 밀 밭을 지나는 바람소리와 푸른 밀냄새를 맡곤 했었다. 나는 아마 앞으로도 다시는 이렇게나 간절한 무언가를 찾아내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이 길이 그리워지는 이상한 감정의 끝엔 또 다시 이 길을 그리워하는 내가 서 있었으니까.


아마 나는 이 소리가 그리워 오랫동안 방황을 했던 모양이다. 밀 밭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눈가가 시큼거리다 코 끝이 아리다 결국은 소리내어 하하 웃고 말았다. 온 몸을 휘감던 열기가 지나자 감기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지기 시작한다. 아마 감정의 끝을 그 어떤 뜨거움을 지나친 나의 열정이 급격히 식어서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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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보이면 꼭 쉬었다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거짓말 같은 순간에 마을이 등장했다. 사람들의 흔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이런 마을에도 창문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걸려있는 걸 보면 얼굴도 보지 못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괜히 사랑스러워지고 만다. 가끔은 온기가 남아있는 공백을 조용히 두드려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매일 이 길과 사랑에 빠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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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아르코스,

이 잔잔하고 조용한 마을에는 거짓말처럼 커다란 성당과 카페가 있었다. 조용한 피에스타에도 묵묵히 각자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을 위해 따뜻한 커피를 준비해주는 사람들. 힘든 몸을 쉬이기 위해 나는 잠시 쉬어가기를 청했다. Daniel은 그런 내 곁에서 함께 쉬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6명의 한국인 사이에서 그는 조용히 쉼표를 찍는다 했지만 본인만 모르는 언어 속에서 어리둥절 앉아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그에게 먼저 함께 길을 나서기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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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이 2년 전 이 길을 걸었을 때는 허름한 집에 사시는 할머니가 대문 밖으로 나와 부엌에 있는 사과를 깎아 순례자였던 자신에게 건냈었는데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런 따뜻한 호의를 느낄 기회가 없어 무척이나 아쉽다는 이야기를 건낸다. 아마 시간이 더 지나고나면 이 길은 더욱 여행지와 닮아있는 느낌으로 다가오게 되지 않을까. 몇 년 후에도 지금만 같았으면 하고 조용히 바래보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여러 생각으로 잔뜩 복잡해진 머리는 오늘 '산솔'이라는 곳에서 쉬어가길 청했다. 이 마을은 그 어느 곳보다 더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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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살의 Daniel의 적극적인 공세에 무척이나 부담스럽기 시작했지만 조금 이른시간에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체크인을 마쳤다. 남/녀 공용의 화장실+샤워실을 가지고 있는 가정식 알베르게의 총 수용인원은 12명. 오늘 첫번째 손님은 바로 우리라는 소식을 주인 아저씨께서 건내셨다. 점차 두려워지기 시작한 이유는 Daniel이 오늘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입 밖으로 아무렇지 않게 꺼냈기 때문이다.



짐을 풀고 땀 냄새를 씻어내고선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사람이 없는 알베르게를 만나는 행운이 찾아왔지만 그것은 이내 행운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1시간을 기다리고, 2시간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점차 나는 그와 단 둘이 이 알베르게에 머물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전화를 재촉하는 나를 이기지 못하고 그는 어제까지 함께 길을 걸었던 미국인 일행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우리의 위치를 알렸다.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서 나는 얼마나 환희를 외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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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마을엔 레스토랑이 없는 관계로 작은 구멍가게에서 바게트, 맥주, 파스타, 소세지, 양파, 버터, 마늘을 사서 함께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 마늘을 다지고 바게트에 적당한 양의 버터를 바르고 마늘빵을 만드는 친구들의 모습이 왠지 익숙해 보인다. 누구 하나 빠지는 사람없이 각자 할 일을 찾아서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이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했다.


저녁을 먹고 우리가 통째로 빌려버린 알베르게 주방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속 마음을 털어놓는 시간을 가졌다. 이미 이혼의 경험이 있는 션은 자신의 과거를 덤덤히 털어놓으며 맥주를 들이켰고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진 나는 먼저 잠자리에 들겠다고 말하고선 방으로 들어가 침낭을 부스럭거리며 잠의 언저리를 거닐고 있었다. 잠이 들락날락 하는 찰나, 문이 열리고 어느새 내 뒤를 따라온 Daniel은 침낭을 살며시 걷고 잠이 든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본인의 침낭을 찾아 들어갔다.


하, 그 순간 나의 모든 잠은 지구 끝까지 도망가버렸고 나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다 동이 트는 소리를 듣고선 짐을 하나 둘 싸고 나홀로 도망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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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산솔


'거절'을 못해서 손해를 보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던 나는 카미노에서도 여전히 나답게 살고 있다. 궂은 일을 당할지도 모를 경험을 하면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경험을 계기로 내가 한 순간에 달라질 것이라 기대하진 않지만 아주 조금씩만이라도 바뀌어가길 간절히 바래본다.

더 이상 '누군가의' 착한사람이 되고싶진 않다. 이제 나는 '나의 착한 사람'이 되는 목표가 생겼다. 나에게 좋은 사람, 나에게 착한 사람,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그런 목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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