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에 정해진 룰은 없다.

산솔 - 로그로뇨

by Jessie

지난밤, Dainel에게 의도치 않은 굿나잇 키스를 받는 바람에 밤새 잠을 설쳤다. 썩 좋지 않은 기분으로 제대로 잠 한 숨 못 자고 모두가 잠들어있는 새벽 4시 30분에 길을 나서기 위해 주섬주섬 짐을 정리했다. 여전히 오락가락하는 날씨 때문에 빨아둔 등산 양말도, 속옷도 채 마르지 않았다. 녀석들을 옷핀에 꿰어 가방 한편에 길을 나섰다. 그들을 두고 혼자 길을 나선다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우리가 인연이라면 길 위에서 또다시 만나게 될 테지.


새벽 5시쯤이면 동이 틀거라 생각했고 산솔 마을 어귀에 앉아 짐을 정리하는 순례자도 있기에 별다른 걱정 없이 길을 나서는데 아무리 걸어도, 용기를 내어 씩씩하게 발걸음을 내딛어도 어둠 속에는 한 시간이 넘도록 나 혼자 뿐이다. 잠시 쉬었다가 동이 트면 움직일까를 몇 번이고 고민했지만 이런 두려움 정도는 이겨내어야 더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서야 무거운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어두운 터널과 밀 밭을 지나자 커다란 마을이 등장했다.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머물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어제 5분만 더 고생했더라면 이렇게 새벽부터 길을 나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그래도 숀과 지난밤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음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감사했다.


지난밤 숀은 지난 사랑 이야기를 나에게 덤덤하게 건넸다.



"몇 년 전, 나는 이혼했던 여자를 만났었어. 그 여자도 나도 우린 서로 많이 사랑했었지.

그런데 완전히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즉, 상처 받은 자아를 가진 사람과 함께 했던 일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더라.

나는 그녀의 상처 받은 자아를 껴안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우리 둘은 행복해지지 못했고 이별을 선택했지.


그리고 나는 1년간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어. 만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그 누구와도 데이트를 하거나 사랑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야. 나에게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시간이 필요했고 1년 동안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완전한 자아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어. 물론 완전하다는 것은 불가능한 말이지만 나에게 완전하다는 말은 다른 이를 보듬을 수 있는 상태의 마음을 말하는 거지.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비로소 지금의 여자 친구를 만날 수 있었어. 우리는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있고 나는 지난 1년의 시간 동안 지금의 그녀를 만나기 위한 성숙의 과정을 겪어낸 것이라 생각이 들어. 그녀와 나는 결혼을 꿈꾸고 있고 서로 많이 사랑하고 있지. 아마 우리 둘 다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어서 둘이 될 수 있었던 것이겠지. 그녀는 나이는 조금 어리지만 정말이지 성숙한 사람이고 그녀의 말처럼 분명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난 확신해.


결국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했던 잘못들 모두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그 잘못들에서 벗어나 너를 더 아끼고 인정해주고 그리고 그런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거야. 너는 너를 아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난 확신해"


나에게 따스한 말을 건네던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눈이 다른 누구보다 진실되게 반짝였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는 그녀를 이야기할 때 유독 까만 눈을 반짝였다. 그가 그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느끼던 순간이었다.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인생을 통해 무언가를 배웠다. 마음의 무게는 매일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지난밤, 잠을 설쳐서였는지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카미노를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째, 여전히 매일 마주하는 풍경들이 새롭다. 마을을 만나면 언제나 주린 배에서 신호를 보내곤 하는데 오늘도 역시나 마을의 고즈넉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것은 어쩌면 마을 어귀에 닿을 때마다 어딘가에서 풍겨오는 빵과 커피의 냄새 때문일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에스프레소 마시는 일을 즐긴다는 것을 순례길을 걸으며 알게 되었다. 그들이 작은 컵에 담긴 에스프레소 한 잔과 함께 아침을 시작하는 풍경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날들이었다.


아직 9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 골목은 여전히 잠들어 있다. 이따금 창문을 여는 소리와 아침을 준비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출근길에 오를 시간이지만 이상하게 이 곳에서는 시간이 무척이나 더디 흐른다. 그동안 한 시도 쉬지 않고 바삐 살아온 나의 인생에 문득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천천히 흘러가도 괜찮은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길은 나에게 말하곤 했다.


‘느리게 가도 괜찮다. 결국 시간은 모두에게 평범하게 흐르고 있고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결국은 모두가 정해진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조용한 골목을 지나자 마을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카페가 등장했다. 자전거를 세우고 익숙한 듯 카페로 들어가는 한 남자의 뒤를 쫓아 카페로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이 커피 한잔과 신문 한 부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카페에서 나에게 꽤 많은 시선이 머물다 갔다. 혼자인 동양인 여자에게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종종 머물곤 한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그들에게 용기 내어 "올라"라고 손을 흔들면 그들 역시 "올라"하고 대답해준다. 그들의 정제되지 않은 호기심이 너무나 귀여워 웃어버리고 만다.










카페에 들어서면 언제나 한결같은 주문을 던진다.

"우노 카페 콘 레체" 그리고 잠시 베이커리 앞에서 고민의 시간을 가진다.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다) 다섯 번쯤 눈이 껌뻑거렸고 주인은 나의 주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씩씩하게 외쳤다. "우노 크로와상, 그라시아스" 그렇게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를 하는 시간. 마땅히 쓸 말도 없으면서 나는 또 무슨 영감이라도 떠오를까 수첩과 펜을 꺼내놓고 괜히 한참을 끄적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를 적었고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다른 그 누구도 쉽게 믿거나 따라가지 말 것!'










마을을 지나면 작은 터널을 지나게 된다.


아무도 없는 터널을 지나는 일은 무서운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뙤약볕을 한참 동안 걸어온 순례자에게는 이것만큼이나 감사한 존재가 없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저 반가운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터널을 지나다 보면 벽 한 가득 각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낙서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곳에서도 한글로 쓰인 낙서가 있을까 나름 노심초사하며 건넜다. 이 먼 나라에서 한글로 그려진 낙서를 보게 된다면 나는 조금 부끄러워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걸어 터널 끝에 닿으면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그려놓은 가리비 모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엔 카미노라니, 매일 몇 번이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듣곤 하는 말이지만 몇 번을 들어도 좋은 말이다. 나의 길을 축복해주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듣게 된다면 더욱더.












터널을 지나 걸음을 옮기다 보면 포도 묘목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같은 크기, 같은 푸르름으로 줄 맞춰 정열해 있었다. 포도밭을 지날 때마다 주인이 얼마나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키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났던 건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며 부모님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키웠는지를 짐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나 보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었으니 아빠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더 많은 기대를 가지셨던 걸지도 모른다. 아빠의 서운했던 마음이 이 풍경 하나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빠에 대한 생각에 빠져 걸음을 걷다 보니 어느새 길을 잃고 말았다. 그냥 발 닿는 대로 가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며 무심코 걷다 보니 광활한 밭 어딘가에 허수아비처럼 우뚝 솟아있는 나를 발견했다. 멀리서 밭주인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나를 향해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꼴딱 삼켰고 이내 알지 못하는 스페인어 몇 글자를 읊어본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의사소통 끝에

"카미노 데 산티아고?"라고 물어보니 아저씨는 다시 엄청나게 빠른 스페인어로 뭐라고 설명을 해주셨다. 긴 대화 끝, 결국 아저씨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이야기 중간중간 섞여있는 손짓 덕분이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씨씨 (네네)"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엄청난 열정으로 길을 알려주시는 아저씨께 실망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길은 어디로든 통하게 되어 있으니 아저씨의 손짓처럼 대충 밭을 빠져나가 큰 길가 쪽으로 나가면 길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신 아저씨에게 고마워 살짝 뒤돌아보니 아저씨는 한참이나 멀리 세워둔 차로 저벅저벅 걸어가고 계셨다. 멀리서 도움이 필요한 듯한 나를 보고 먼 걸음을 해주신 것이었다. 눈물이 잠시 핑 돌았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이런 작은 친절이 왜 이리도 나는 이 순간 감격스럽게 느껴진 걸까.

밭이 끝나는 길, 문득 돌아보니 아저씨는 내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으시다가 뒤돌아본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계셨다. 신은 매 순간 존재했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었고 덕분에 판초우의를 꺼냈다 입었다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 이젠 비가 내리지 않아도 입고 걷기 시작했다. 작은 성당 앞에서 밀 밭을 일렁이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먼저 "올라"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선 아주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로그로뇨까지 태워주어도 괜찮겠냐고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정말 괜찮다고 물어봐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다시 길을 나서야겠다고 말했고 그는 내 등 뒤로 흘러가는 인사처럼 말했다. "나도 로그로뇨에 살아. 거기서 볼 수 있으면 좋겠네~" 그때까지도 나는 그 말을 그냥 귓등으로 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로그로뇨가 10km도 채 남지 않은 지점,


길을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곤 하는 습관 덕분에 누군가가 남겨두고 간 마음을 발견했다.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으신 누군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깊은 마음이 느껴지는 풍경이다.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그는 얼마나 무거운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걸까. 이 먼 길을 떠나와서도 가족들의 생각을 놓지 못하는 이를 떠올린다. 그 흔적 속에서 문득, 아빠의 모습이 스쳤다. 아빠도 편지 쓰는 걸 참 잘하는 분인데 아빠와 함께 이 길을 걸으면 우린 어떤 이야기들을 하게 될까. 나는 과연 아빠가 나에게 주었던 상처들을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아빠와 함께 기울이는 소주 한 잔이 간절해졌다. 아빠에게도 긴 휴가를 드리고 싶었다. 일도, 가족도 내려놓고 마음이 쉴 수 있는 그런 휴가 말이다. 30년의 시간 동안 한 회사에서 청춘을 바쳐가며 일한 아빠는 얼마나 쉼표를 바라고 바랐을까.



포도밭 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도시가 보인다. 생각 없이 무심코 걷다가도 시야에 마을과 도시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발걸음이 빨라진다. 도시에 가면 내가 필요로 하는 그 많은 것들이 모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버리기 위해 걷기 시작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척이나 간사해서 도시를 지나는 시간이 오면 잠시 잊고 있던 맛들을 끊임없이 떠올리곤 한다. 나는 걷는 내내 그동안 필요했던 것들의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작성하고 있었다.








드디어 로그로뇨.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러 알베르게 위치를 물었다. 파리에서 머물 당시 민박집에서 일하는 오빠가 추천해주신 도네이션 알베르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인데 오후 1시부터 체크인이 가능하다기에 아쉬운 대로 도시를 돌아보기로 했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커플에 한참 동안 시선을 뺏기고 있던 찰나 누군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알고 보니 작은 성당 앞에서 나에게 차를 태워주겠다며 이야기를 건넨 그 아저씨였다. 기가 막힌 인연이라며 나에게 배가 고플 텐데 카페에서 허기를 채우는 건 어떨지 제안을 해왔다. 어차피 나에게는 체크인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있는 관계로 그가 소개하는 맛집을 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아저씨와 스페인어를 못하는 내가 만나면 어떤 대화가 가능한 걸까 꽤나 궁금했는데 산티아고를 두 번이나 완주했다는 아저씨의 니콘 카메라의 사진을 보며 우린 하나의 공통점으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수준급의 사진에 감탄을 했는데 알고 보니 직업이 사진작가란다.


하몽이 주렁주렁 매달려있기에 신기해서 바라보고 있었더니 배고픈 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는 듯 아저씨가 매우 익숙하게 하몽 샌드위치 하나를 주문하고선 맛있게 먹는 나를 매우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와인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했더니 본인이 자주 마시는 와인 두 잔을 주문하는 추진력까지. 괜히 까칠하고 냉랭하게 굴었던 내가 부끄러워진 순간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내 손을 잡은 아저씨는 내 손이 왜 이렇게 차갑냐며 나도 하지 않는 걱정을 하기 시작하셨다. 부담이 배가 되어 음식을 우걱우걱 입으로 밀어 넣고는 가야겠다고 말을 하니 그는 내 목적지 알베르게까지 걸어서 나를 데려다주었다.


다음 날 아침, 출사를 간다는 그는 괜찮으면 차로 태워주겠다는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산티아고를 걸으며 꼭 그래야만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 두 다리로 길을 완주하겠다는 다짐을 깨고 싶진 않았던 지라 그에게 몇 번이고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 맞는지 그는 아침 8시 반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나는 아침 7시에 길을 서기로 마음먹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매일처럼 샤워를 하고 젖은 빨래를 널고 침대의 청결 여부를 확인한 후 침낭을 깔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J와 Y언니와의 예상치도 못한 재회 후, 우리는 로그로뇨라는 도시 탐방을 하기로 했다. 아주 오랜만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베어 물고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쾌감이 들었다. 언제나 자발적 백수였지만 지금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발적 백수였으니까 말이다. 버거킹의 햄버거 하나에 나는 또 왜 그리 행복했는지. 이 길 위에선 모두가 단순해지나 보다.









파리 민박집 오빠의 조언은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 머무는 알베르게는 성당에 자리하고 있는데 도네이션(원하는 만큼 기부)인 데다가 저녁과 아침까지 제공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햄버거를 먹었기에 저녁이 무엇인지 구경만 하려고 했으나 맛있는 닭요리 앞에서 저녁을 먹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사실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이야기가 나누고 싶어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국적과 이름을 말하는 시간을 가졌고 저녁에는 성당 내부에서 미사까지 있다고 하여 그 성스러운 시간을 함께 하기로 했다.










네이버의 '비바 산티아고'라는 만화를 봤다면 기억날지도 모르는 그 비밀통로가 있는 알베르게가 바로 이 곳이다. 우리는 모두 성스러운 마음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미사 드릴 준비를 했다. Y언니와 기적처럼 나타난 J와 함께 영문으로 된 팸플릿을 들고 앉아 다소곳이 기도를 하며 나를 내려놓는 시간을 가졌다. 신부님 앞에서 순백의 사람이 되는 시간, 곁에 있는 누군가의 눈물 훔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그 성스러운 기도와 축복 속에서 저마다 길을 떠나온 이유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스페인어를 온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모두가 눈물을 흘렸던 것은 그 공간이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가 너무나도 따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베르게의 클로징 시간은 밤 열 시쯤이지만 Y언니와 J는 내일 버스를 타고 산토도밍고로 가겠다고 하여 우리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만남을 기념하며 근처 Bar에서 술을 한 잔 기울였다. 순례길 이틀째에 처음 만난 서로에게 쏟아놓았던 비밀은 모두 잊은 것처럼 우리는 꽤 유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꾀죄죄한 우리의 모습과는 달리 주말을 맞이한 스페인 사람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열정적이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알베르게 문 닫는 시간을 훨씬 넘겨버린 지라 우리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알베르게로 향했지만 담배를 피우러 나온 누군가 덕분에 열려있는 문으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만남은 언제나 짧고 이별은 매번 아쉽기만 하다.








6월 1일_로그로뇨


양말 두 개를 겹쳐 신고 걸으면 고통이 덜하다는 이야기에 양말을 두 개나 신고 걸었더니 발톱이 쓸려 모든 걸음이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발톱이 빠졌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침을 꼴깍 삼키고 마는 나다. 오랫동안 쉼 없이 걸었던 탓에 물집도 생기고 컨디션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서 마음이 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발을 보더선 다들 카미노에 정해진 룰은 없으니 스스로만 생각하고 상황에 맞춰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내가 걷는 길이 '카미노'가 되고 내가 하는 일이 모두 '답'이 될 테니 말이다.


카미노를 걸으며 나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싶었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생각이 증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기 위해 내가 이 곳에 온 것인가를 자꾸만 스스로에게 되묻고 만다. 나는 이렇게 나를 또 혹사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Y언니는 나에게 조금 더 천천히 걸어보라고 조언을 건넸다.


그래,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고 나는 매일매일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사람들과 만나면서 하나씩, 하나씩 깨닫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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