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일기 #애증
애증
사랑과 미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
애증이라는 단어는 뜯어볼수록 신기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각각의 단어가 비슷한 뜻을 지닌 경우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지만 짧은 두 글자가 그 작은 공간 안에서 각각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니 이런 경우야말로 단어가 가진, 글이 가진 능력을 믿게 되는 순간이다. 아무튼, 나는 애증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회사의 빈 회의실에서 얼마 남지 않은 점심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때마침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전화는 우연처럼 그 애증의 대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잘 지내니?”
“네, 잘 지내죠. 재미는 없지만요. 마스크 끼고 다니시죠? 요즘은 병원도 위험하니까 웬만하면 가지 마시고 집에서 쉬세요”
걱정스러운 내 목소리가 멈추고도 한참이나 소란스러운 길거리 위 소음이 수화기 너머의 공백을 채웠다.
“병원에 안 가는 게 더 어렵고 위험한 일이야. 마스크 잘 끼고 나왔으니 걱정 말아라”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많은 감정들에 휘둘리며 힘들어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했다.
그와 나는 띠를 두 바퀴 가까이 넘어야 할 정도의 나이 차를 지녔다. 엄마와 동갑인 그 어른과 나의 공통점은 호주의 서쪽을 깊이 탐닉하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애정에 대한 깊이는 다르지만 그곳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비슷한 온도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 일을 시작했다.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그곳에서 배고프고 어려운 일들을 해나간 것이 우리의 교집합이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고용주였고 나는 고용된 사람이었다는 것. 사회생활이 처음이던 나에게는 공정한 것과 열정, 좋아하는 일을 위해 내가 들여야 하는 시간들에 대한 개념들이 지나치게 모호했다. 그 누구도 가르쳐준 적이 없었기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에 대한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야속하게 시간은 자꾸만 흘렀다.
내가 4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하나 둘 직장을 얻거나 스펙을 쌓기에 바빴고 부모님은 60리터 배낭 하나를 메고 호주로 떠나버린 딸을 기억에서 애써 지워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4년의 시간 동안 제대로 쥐어본 월급은 고작 6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회사는 학비를 지원해주었지만 사실 월급으로 치면 그것은 월급에도 채 미치치 않는 금액임에는 확실했다. 시작은 가난해도 그 열정 어린 움직임들이 좋은 결과를 냈다면 원망의 골이 깊어지지 않았을 텐데 시간이 지나도 현실은 여전히 바닥 언저리였다. 배가 고플 때면 내가 과연 이 일을 좋아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에 머무르며 삶이 점차 너덜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나는 결국 호주를 떠나왔다. 그게 내가 연결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반대되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있었다. 호주를 좋아하는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이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먼발치에서야 깨닫게 된 것이었다. 순수한 마음이 구겨지고 나면 다시는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으니 마지막이 아름다웠을 리는 없었다. 결국 나는 그동안의 분노와 불합리, 보이지 않는 폭력을 내세우며 내가 받아야 될 숫자들을 끊임없이 내뱉었다. 태어나서 누군가를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나조차도 처음 보는 나 자신을 만나게 된 순간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향해 차갑게 비수 같은 말들을 쏟아낸 것이 그 어른과 나의 끝맺음이었다.
돌아보면 내가 그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는 말이었을 것이다. 어떤 날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뽑지 못해 하는 일들이 모두 어려워지길 바랐고, 어떤 날은 가지고 있던 것들을 하나 둘 잃어가기를 바랐으며 또 어떤 날은 내가 남기고 온 모든 흔적들이 매 순간 괴로움을 남기길 빌었다.
어느 순간부터 삶을 사느라 나의 미움은 시간에 점차 풍화되어 갔다. 그렇게 모든 것들을 까무룩 잊어갈 무렵, 갑작스레 어른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내가 진심으로 빌었던 모든 것들이 이루어졌다는 소식. 그런데도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던 아웃백의 연못에서 함께 여행을 하던 이가 갑자기 나비가 되어 사라졌다는 이야기. 그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우울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어른의 모습과 우리가 힘들게 일궈온 일에 대한 모든 기억의 조각들이 하얗게 번져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어떤 위로도 전하지 못한 채 애꿎은 술을 빈 속에 들이키며 그날 밤은 결국 취해버렸다.
얼마 후, 우리는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재회했다.
몇 년 만에 만난 것이지만 그 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한국에 올 때면 잊지 않고 찾았던 피맛골 입구의 메밀국숫 집에서 허기를 채웠다. 바닥이 보이는 나와는 달리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어른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안타까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려야만 했다. 아마 호주에 남았더라면 나도 함께 상처로 안고 살았을 그 사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그는 여전히 야위어가고 있었다. 나비가 되기 직전에 마주친 이의 눈빛이 잊히지 않아 매 끼니 크고 작은 알약을 먹으며 감정을 억제하는 그 어른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그간의 미움이 이미 바래버린 뒤였다.
난 그 하얗게 바래버린 나의 감정을 ‘애증’이라는 단어 외에는 여전히 설명할 길이 없다. 애정에서 시작해 결국 미움이 되기까지 억 겹의 감정과 시간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말. 나는 병원의 반질반질한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는 어른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애증’이라는 이 짧은 단어야말로 가장 깊고 오래된 인간의 감정을 담고 있는 말이라고 일기장에 담을 수 있었다.
시간에 풍화되어야만 비로소 읊을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말, 미움에서 끝난다면 영영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르는 말.
우리가 같은 뜻의 ‘증애’라는 말보다 ‘애증’을 주로 쓰는 이유는 그 단어를 읊을 수 있게 되기까지 감정은 사랑에서 시작해 미움에 닿으면서야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