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일기 #설렘
설렘
명사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들떠서 두근거림. 또는 그런 느낌.
내가 지난 1년 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네가 결혼을 할 줄은 몰랐다”는 인사 였다. 꽤 우스운 것은 이러한 인사를 듣는 나조차도 과연 내가 결혼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라며 결혼에 대한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여전히 결혼을 어떻게 하게 된거예요? 라는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 본 적이 없다. 너무 감격스러운 결혼을 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나조차도 어째서 결혼을 하게 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경험자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결혼이라는 것은 정말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서 시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쪽의 의견이 단단하다면 그 것에 이끌려 얼렁뚱땅 진행되기도 하는 것이라고 나는 깨닫고 마는 바이다.
우리는 2016년 봄, 호주
한 달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함께 일할 괜찮은 사람을 뽑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메일로 들어온 이력서를 들여다보며 적절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사무실에 찾아왔을 때 그 사람과의 팀워크가 얼마나 맞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했다. 꽤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했고 인터뷰도 점차 지쳐가고 있던 날이었다. 어느 오후에 한 커플이 인터뷰를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함께 왔던 여자 분의 얼굴은 이제 기억 나지 않지만 파란 니트를 입은 남자는 여전히 선명하다. 꽤 오래 한국에서 바리스타를 했다던 그 남자는 일자리가 구해지지 않아 청소를 하던 중 구인 공고를 보고 찾아왔다고 말했다. 첫 인상에서부터 반듯함이 느껴졌던 그 사람은 여자친구를 대신해 우리의 팀원이 되었다. 그 당시 우리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사막에 가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는데 45인승 버스를 이끌고 내가 서호주에 대한 정보들을 여행자들에게 설명하며 사막으로 향하는 동안 그는 사륜구동자동차를 타고 사막 입구에서 사막 투어를 할 사람들을 기다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10대의 사륜구동 미쓰비시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언제봐도 질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싶은 마음에 그 곳으로 가는 날을 기다리는 줄만 알았는데 그 것이 곧 누군가와 마주치는 일을 기다리고 있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편파적인 관심을 주지 않기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응원과 격려를 나누고 한 달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나는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에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외면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숨기기 힘든 것이 가난, 기침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내가 느끼는 낯선 감정이 설렘이었다는 것을 나보다 먼저 그가 깨달았다고 했다. 계절이 바뀌고 꽃이 피는 것처럼 감정이라는 것 역시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빠르게 번지고 만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 헤어졌다는 그를 다독이며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반듯하고 따뜻한 사람 곁에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설렘 그 이상의 감정이어서 그 시절의 나를 만난 누구라도 내가 사랑에 빠진 사람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호주의 반짝이는 날씨만큼이나 그와의 하루하루는 맑음의 연속이었다. 하얀 면바지에 니트를 입고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를 보는 일이 이토록 가슴 설레는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함께 호주에서 보낸 반 년의 시간은 날씨 탓이었는지, 장면 탓이었는지 봄냄새가 가득한 날들이었다.
봄으로 가득했던 우리가 마침내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겨울 냄새가 가득한 계절이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생존’에 더 가까운 시간들을 보내던 시간들 말이다. 겨울바람을 어렵게 이겨낸 우리가 다시 봄의 계절을 마주 했을 땐 그토록 반짝였던 설렘이 하얗게 바래 버린 채였다. 나는 우리 사이에 놓인 그 것이 어느새 편안함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끔은 언제 느꼈을 지 모를 설렘이 그립기도 하지만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고서 얻게 된 지금의 감정이 우리에겐 그 무엇보다 가장 어울리는 감정임을 이제는 안다. 못난이 안경을 낀 그의 얼굴을 보며 결혼은 결국 설렘이 편안함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문장을 깊이 떠올렸다.
일상 계정 @fightingsz
그림일기 계정 @jessie_evenfolio
https://www.instagram.com/jessie_evenfolio/?hl=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