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이 되지 않는다는 적절한 핑계
로드트립을 떠날 때는 생각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초등학교에서 배웠던 인간에게 필수적인 3요소(의식주)를 지긋이 들여다봐야 하는 시간이 바로 이 때다. 로드트립을 떠날 때는 여정이 며칠이나 되는지, 함께 떠나는 인원은 몇 명인지를 염두에 두고 준비를 시작한다. 오퍼레이터로서 전체적인 것들을 두루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의료키트와 위급상황에서 쓸 위성폰을 비롯해 텐트와 침낭, 의자와 텀블러와 식기류, 식단에 따른 식료품 구매를 끝내고 그 후에야 비로소 개인적인 채비를 하게 된다. 이를테면 옷과 속옷은 몇 벌이나 준비를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정도랄까. 아, 파리망 Fly net도 필수적으로 챙겨야 하는 항목이다.
그 외에도 준비해야 하는 것은 바로 통신이 되지 않는 허허벌판에서의 대비이다. 구글 지도가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는 곳에서 인간은 과거로의 회귀를 기꺼이 감내해야만 한다. 여행하는 지역을 상세하게 그려놓은 지도(Hema에서 만든 지도가 월등히 좋다)는 필수적인데 주유를 할 수 있는 다음 지점까지의 거리를 늘 계산해 두어야 길 한복판에서 멈춰서는 불행을 피할 수 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위성폰이라는 것을 늘 챙겨서 다녔는데 위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위성을 이용해 외부로 전화를 걸 수 있는 기계였다. 내가 있는 동안에는 한 번도 쓸 일이 없었지만 그만두고 난 다음 해에 그레이트 빅토리아 사막 Great Victoria Desert에서 랜드크루저는 자동차로서의 생을 마감했다. 전복 사고를 당했는데 결국 폐차에 이르게 되었다고. 꽤나 정이 들었던 친구였는데 이젠 사진으로 만나볼 뿐이다.
아웃백을 여행할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위트를 담고 있는 표지판이었다. 물론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Next Destination 1,065km와 같은 표지판 앞에서는 실소가 터져 나오기도 했는데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400km를 조금 웃도는 대한민국에서는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 거리임에는 확실하다. 물론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중간중간 휴게소에 들러 주유를 하고 재정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호주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터넷조차 되지 않는 도로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수다를 떨거나 그마저도 지겨워지면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하염없이 보는 일 밖에 없기 때문이다.
호주 전체를 연결하는 1번 도로의 경우에는 포장이 잘 되어있고 중간중간 로드 하우스를 만날 수 있지만 비포장도로의 연속인 아웃백에서는 사람을 만나는 일조차도 어렵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어려움을 해결하는 준비가 필수적이다. 수동의 투박한 랜드 크루저를 몇 년 간 (보조석에) 타고 다니면서 의도치 않게 잔기술들을 익혔다. 기본적으로는 주유를 할 때 죽은 벌레가 잔뜩 말라 붙어 있는 유리창을 닦는 일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비포장 도로를 달리기 전이나 후에 타이어 공기압을 체크하고 바람을 조절하는 일이라던지, 엔진오일 상태를 점검하는 일, 구멍 난 타이어를 때우는 일 혹은 시가잭이나 라이트가 나갔을 때 자동차 매뉴얼을 보며 가지고 있던 족집개를 이용해 퓨즈를 교환하는 정도이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은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동기어 차량의 운전은 나에겐 불가능의 영역이었기에 보조석에 앉아 지도를 보거나 운전하는 사람의 졸음을 쫓는 역할을 부여받았는데 잘 부르지 못하는 목청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달리는 차 안에서 커피를 제조하는 일(때론 컵라면도 준비했다), 맛있게 과자를 먹고 브이로그 영상을 찍는 일 또한 내 몫이었다. 물론 그것들은 누구도 시킨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웃백을 달리던 중 도심에 들어서면 필수적으로 하는 일이 있었다. 첫째는 대형마트에서 식재료와 와인을 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연료통 가득 주유를 하는 것이었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미친 듯이 뛰어오르는 물가에 지갑이 자꾸만 가벼워진다. 그렇다고 200km마다 만나는 로드하우스를 지나치고 갈 수는 없는 일이고 말이다. 그래서 도시에 가면 해야 할 일이 유난히 많아진다. 대형마트에 들러 식재료를 한가득 주워 담고 주유소에 들러 만땅으로 주유를 하는 일뿐만 아니라 미리 준비해서 간 여분의 연료통 두 개에도 디젤을 가득 채워준다. 사막 한가운데서 파리의 공격을 이겨내며 셀프 주유를 하는 일이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공감할 수 없는 가려움이다. 대형 마트에서 식료품을 사면 영수증 끄트머리에 주유 할인권이 붙어있는데 영수증을 필히 지참했다가 주유소에 들르면 씩씩하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렇게 절약한 돈으로는 레드불을 사서 다시 먼 길을 떠나는 에너지를 충전했고 말이다. 이젠 입에도 대지 않는 레드불은 그 시절 나에게는 필수품이었다.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몇 시간 동안 똑같은 풍경을 보며 잠들지 않기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도시나 로드하우스에 도착했을 땐 쉴 새 없이 울리는 카톡을 읽느라 갑자기 바빠지는데 쌓여있는 연락들에 답장을 채 하기도 전에 다시 까마득한 여정을 출발하게 될 때면 점차 줄어드는 핸드폰 상단의 안테나 표시가 그렇게나 아쉬울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아웃백에선 채 듣지 못한 노래도 너튜브 검색을 통해 들어야 하니 짧지만 굉장히 바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고요해지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모두가 이 여행을 떠나와서는 하늘을 한번 더 바라봤고 모래사막을 몇 발자국 더 걸었으며 그리운 이에게 엽서를 쓰고 책을 한 장 더 읽었다. 그리고 처음 공항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조금은 편안한 얼굴을 한 채 배웅을 하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음이 소란스럽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때는 고요한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잠시 모두에게서 멀어지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웅크린 시간을 틈타 지도를 그려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때론 많은 이들이 닦아놓은 길 위에 있었고 이따금 앞서간 이의 흔적이 희미한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잘 닦여진 길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지루했고, 사람들의 흔적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길에서는 풍경을 볼 겨를조차 가지기 어려웠지만 땀을 닦을 때마다 마주하는 장면들이 선명하게 가슴에 남았다. 무엇이 더 나았다고 경중을 가리기는 어렵겠지만 저마다의 풍경이 주는 깨달음은 내가 나만의 지도를 그려가는데 분명 많은 깨달음을 주었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호주로의 여행을 떠나길 바란다. '해야만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시간은 살면서 그리 오래 가질 수 없는 것일 테니까. 고요가 주는 시간들 속에서 부디 당신도, 나도 더 깊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