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익숙해졌다는 건

같은 길을 다른 마음으로 걷게 되었다는 뜻

by Jessie


어느 날부터 길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사이공에서의 시간이 일 년을 조금 넘겼을 즈음이었습니다. 아침 여섯 시, 강아지 산책을 나서면 늘 같은 풍경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막 문을 여는 카페의 소리, 간밤의 흔적들을 부지런히 쓸어내는 아르바이트생, 매일처럼 같은 시간에 달리는 갓 돌 지난 아이 아빠와 2층 테라스에서 몸을 푸는 할머니. 그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나면 비로소 하루가 시작됩니다.


동이 트면 습관처럼 강아지의 이름을 부릅니다. 잠시 뒤, 어딘가에서 달려오는 발소리. 설렘이 담겨 있는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아침이 조금 더 또렷해집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길을 자주 걷다 보니 대문 너머에 사는 강아지들의 얼굴도 하나씩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변화는 저를 오래 기쁘게 합니다.


해외에서 산다는 것은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는 일에 가깝지만, 저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리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여전히 여행하는 것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다니다 보니 길의 이름을 외우는 일은 쉽지가 않지만, 낯선 글자 대신 눈에 익은 풍경들이 한편에 쌓여 갑니다. 어느 골목을 지나면 유난히 살가웠던 고양이가 떠오르고, 어느 모퉁이를 돌면 손글씨로 쓴 메뉴판이 아름다운 카페가 생각나곤 합니다. 그렇게 기억은 길 위에 남습니다.


익숙한 곳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조금 더 단단해지는 기분을 느끼면서요.


저는 원래 많이 보는 여행보다 비워둔 여행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하루에 하나의 계획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길에 맡기는 방식.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가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면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가는, 조금은 지루한 사람.


낯선 곳에서 익숙한 자리를 만들어가는 일. 어쩌면 저는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길들도 조금씩 저를 알아보는 듯합니다. 길을 완전히 외운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길을 잃고 있다는 기분은 들지 않습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어딘가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길을 다른 마음으로 걷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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