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아이의 성장기

마지막 5회

by 김해경

작은 아이는 뉴욕에 있는 디자인 대학교를 선택했다. 아시다시피 미국이라는 곳은 정말 학비가 어마어마한 곳이다. (며칠 전 작은 아이의 지인이 중간 정도의 학비인 한 대학원에 진학하는데, 10 강좌를 들어야 졸업할 수 있다고 한다. 한 강좌당 우리나라 돈으로 3백만 원이다. 즉 삼천만 원을 지불해야 대학원을 졸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쉽게 계산하기 위해서 1달러당 1,000원으로 계산한 수치이다.) 대학교에 갈 당시 여러 대학에 원서를 넣어 합격했지만, 가장 학비가 저렴하면서도 괜찮은 대학으로 찾은 곳이 뉴욕 주립의 FIT(Fashion Institude of Technology)였다. 외국 학생이어서 미국 은행의 대출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학비는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가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학비를 낼 때 꼭 은행 잔고를 찍은 통장사본을 학교에 제출해야만 한다. 즉 '학비를 부담할 만큼의 돈이 있으니 당신들 걱정하지 마시오'란 공지를 공식적으로 통보하는 것이다. 또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면 '돈 없으면 공부하러 오지 마라'는 미국 측의 통보이다. 이때가 되면 한바탕 난리를 치른다. 친정언니와 몇몇 친척에게 전화를 해서 잠시 돈을 우리 통장으로 넣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리고 잔고 통장 내역을 카피한 다음 다시 돈을 돌려주는 방법을 4년 내내 했다.


지금 되돌아보아도 집안의 모든 돈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에 침몰하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딱 학비만 보내고 나머지 생활비는 작은 아이가 알아서 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뉴욕이라는 그 화려한 곳에서 작은 아이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던지, 작은 아이는 아직도 대학생활을 이야기할 때면 눈물을 흘린다. 찻값, 밥값이 부담이 되어 대학 4년 동안 친구를 마음 편히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작은 아이는 미국 가기 전 네일 아트를 두 달간 배워 가기로 했다. 그 당시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네일이 보편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기술로 생활비를 좀 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작은 아이를 통해 들은 바로는 미국과 한국의 네일 간에는 추구하는 스타일의 차이가 있어서, 한국에서 배운 네일이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작은 아이는 대학교 1학년 내내 네일아트 가게에서 일하면서, 또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학교 내의 도서관이나 컴퓨터실에서 일을 했다. 그러면서 학과 공부도 해내어야 했다. 패션의 도시, 전 세계의 사람들이 즐겨 찾기를 원하는 도시에서 작은 아이는 그런 도시의 멋을 누릴 여유가 전혀 없었다. 퀸즈(Queens)라는 지역의 허름한 이층 집의 방 한 칸을 한 언니와 함께 사용하면서, 전철을 타고 학교를 오갔다. 또한 부모님이 어려운 가운데서 학비를 대어주고 있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공부를 소홀히 할 수도 없었다. 그러한 옥죄인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작은 아이는 하나님을 찾고 찾다 보니 믿음이 성숙되었고, 또한 순간순간 생각지도 못한 많은 기적들을 경험하기도 했다.


FIT에서는 4학년 2학기가 되면 의무적으로 인턴을 해야 한다. 즉 자신의 전공분야의 회사에 가서 실무적인 일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인턴을 했느냐가 졸업 후 취직에도 영향을 미친다. 인턴은 본인이 알아서 회사를 찾아보고, 인턴을 할 수 있는지를 문의를 하고, 본인의 이력서를 보내어서 통과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일종의 예비취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좋은 회사에서 인턴을 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자질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여서, 취업 시 경력으로 인정을 해 주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도 인턴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너무 힘이 들어서, 1학년 때에만 네일아트 가게에서 일을 하고 그만두었는데, 그때 만난 한 손님이 기억났다고 한다. 네일아트 가게 주인도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어서 그 분야의 사람들이 드나들 때면 작은 아이를 그들에게 소개해 준 것 같았다. 그 손님들 중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다니는 회사가 작은 아이의 꿈의 회사인 것을 알게 되었다.


"저 그 회사에 너무 가고 싶어요. 거기에서 인턴을 할 수 있다면 너무 좋겠어요."

"그러니? 너 나중 4학년 때 한번 연락하렴. 인턴을 할 수 있는지 한 번 알아봐 줄게."


그 말이 그저 흘러가는 말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작은 아이는 그 사람에게 연락을 했다.


"사장님이 유색인은 안 된다고 하네."


이런 내용의 메일을 받고 작은 아이는 한편으로는 절망하고, 한편으로는 분개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그 사람에게 '사장님이 한번 더 생각해 보시기를 부탁하는 이메일'을 보내었다. 작은 아이는 4년 동안 총장 장학금(Presidential Scholarship)을 놓친 적이 없고 성적도 모두 A 이상이었다.


" 사장님께 다시 말씀드렸더니 우리 회사가 생기고 네가 처음으로 유색인으로서 인턴을 하는 거래."


작은 아이의 포기하지 않고, 두드리고 두드린 결과였다. 그 회사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작은 아이가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인턴인데도 주급으로 풍성한 돈을 지불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처음으로 미국 땅에 와서 모든 파트타임 일들을 내려놓고 오직 배우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행복한 시기였다고 한다. 인턴이 끝나고 취업문제를 끄집어내었을 때, 그 사장님의 말로는 '여기까지'였다고 한다. 회사 내에 유색인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이 회사의 인턴 경력 때문에 다른 회사에 잘 취직하게 된 것도 한편으로는 감사한 일이었다.


작은 아이가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한국 유학생들의 수가 중국, 인도 다음으로 많은 숫자를 기록할 때였다. 학교 졸업 후에는 학생비자가 만료되므로, 취업비자를 발금 받아야만 미국 땅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가 있다. 그런데 취업비자라는 것이 쿼터제여서 나라마다 일정한 수가 정해져 있다. 예를 들자면 어떤 나라의 유학생 수가 그 해에 많아졌다고 해서 할당되는 수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나름대로 취업비자의 룰이 정해져 있겠지만, 취업비자를 요청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명확한 기준을 알 수가 없어서, 마치 로또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고 한다. 작은 아이가 다니던 뉴욕의 교회 청년들도 1/3만 살아남고, 2/3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작은 아이와 한 방을 같이 사용하던 언니는 패션디자인을 전공했고, 실력도 쟁쟁해서, 벌써 졸업 전에 유대인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런데 취업비자가 발급되지 않아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 언니는 다시 대학원에 도전해 미국으로 왔지만, 졸업 후 다시 도전한 취업비자에서도 실패를 했다.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인문학 계통의 공부를 한 학생들의 취업비자의 획득률이 실용적인 학문을 공부한 학생들보다 낮다는 통계가 있지만, 이 언니는 그런 경우에도 속하지 않는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왜 이런 인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미국에서 산다는 것이 꼭 승리한 삶이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본인이 원하던 꿈을 이루어 나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작은 아이가 대견하고 기특하다. 정말 어렵고 어려운 대학생활을 잘 견디어내었고, 본인이 원하던 꿈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디는 모습을 보면서, 남편과 나는 경제적으로는 너무 힘들었지만, 그 아이의 성장하는 모습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되돌아보면 지금도 어떻게 학비를 감당했는지 도저히 계산이 되지가 않는다. 친정 언니가, 또 시댁에서 십시일반 도와주신 손길에 지금도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의 속담이 있다. 그 속담이 작은 아이에게 해당되는 말인 것 같다.


작은 아이는 간혹 교회의 힘든 대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힘든 일을 겪은 사람만이 그런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공감할 수 있기에, 작은 아이의 힘든 삶이 결코 헛되지를 않았음에 감사를 드린다. 나는 작은 아이가 앞으로도 남의 꿈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계속 성장하기를 원한다. 누군가가 힘들어 주저앉아 있을 때, 작으나마 한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 따뜻한 온기를 나누어주는 사람, 함께 눈물을 흘러줄 수 있는 사람, 그들의 속마음을 듣고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작은 것이라도 희생할 수 있는 사람, 말보다 행동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의 인생길, 내일 어떤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질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Thouse who sow in tears will reap with songs of joy: Psalms 126:5)"란 자세로 살아가다 보면 고통의 계곡을 지나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 기쁨의 노래가 자신만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남을 위한 기쁨의 노래들로 이 땅 위에 풍성히 채워질 때, 우리들의 삶이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채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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