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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반짝 Sep 03. 2021

제주에서 찾은 희망의 실마리

제주에서 딱 일 년 살았습니다

  코로나로 온 세상이 얼어버렸다. 외출은 제한됐고, 긴급재난문자만 바쁘게 울렸다. 숲세권 아파트에 살고 있었지만 앞산 끄트머리에는 거대한 송전탑이 버티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르내리지 않는 그 산은 얼어붙은 초록의 풍경화일 뿐이었다. 휴직하며 쉬다보면, 자연스레 건강이 회복될 줄 알았지만, 천둥같은 고압선 때문이었을까? 만성염증은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지방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와 보니, ‘급등한 수치들’이 많았다. 미세먼지 농도 수치가 급등했다. 건강염려증이 있던 나는, 시야를 뿌옇게 가리는 탁한 공기에 놀라 아이들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몇 개월 사이에 신도시의 집값이 두 배로 뛰었다. 황망했고 막막했다. ‘사람이 집에서 사는 게 아니라, 집을 사기 위해 사람이 살아야하는구나.’ 무주택자는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유주택자는 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었다. 지금 달리지 않으면 목표점에 닿을 수 없는 마라토너처럼 너도나도 지치고 피곤했다. ‘역세권, 갭투자, 상급지, 하급지, 영끌’. 아, 이건 입시전쟁보다 더 무서운 부동산 공화국의 서열화였다. 도시의 비정함 속에서 내 마음은 늘 가시방석이었다. 몸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기가 힘들었고, 금쪽같은 휴직은 회복의 그림자도 못 밟은 채 속절없이 흘러가기만 했다. 


 마침 제주에 사는 오빠가 육지로 휴가를 떠난다며, 집과 자동차를 빌려주었다. 그야말로 꿈같은 오빠 찬스였다. 보름동안 머물렀던 제주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말했던 시인의 말처럼 정말 어여뻤다. 청명하고 광활한 하늘은 내가 찾고 싶었던 순수의 빛깔이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구름들은 하얀 광목치마를 두른 소녀애의 손짓 같았다. 윤슬이 풍성하게 반짝이던 포구 앞 식당에서 먹었던 흑돼지 삼겹살이 얼마나 맛있었던지. 이건 바다를 먹는 건지, 고기를 먹는 건지 오감이 황홀했다. 


 엄마 품처럼 부드러운 용눈이 오름에 올랐다. 정상에 오르자 청량한 바람이 이마와 등줄기에 서린 땀을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바람결에 미소 짓는 아이들의 표정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붉은 핑크빛으로 띠를 두른 탁 트인 저녁 노을은 숨막히게 아름다웠다. 막혔던 숨구멍이 뻥하고 뚫렸다. 오름에는 말들이 서 있었다. 건강한 몸뚱이와 평온한 눈빛, 보드랍게 빗겨진 꼬리 갈기, 그들에게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윤기가 흘러넘쳤다.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찌릿하고 아파왔다.


‘제주에선 동물도 제 몫의 생기를 누리며 사네. 여기라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토록 찾았던 희망의 실마리였다. 제주에 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인적이 드문 세화 해수욕장에는 바닷 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보말을 잡으러 간 사이, 나는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바다는 태연스레 아름다웠다. 갑자기 서러움눈물이 복받쳤다. ‘깊은 푸른 바다는 어떤 말이든 들어 줄 거야. 파도와 바람결로 토닥토닥 품어 주겠지.’ 물질을 막 끝낸 해녀 아주머니가 보였다. 탐스런 소라와 전복을 가득 담은 망사리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자연은 넉넉하구나. 제주에 살면 내 마음도 여유로워지고 순수해지지 않을까?’


 젊을 적 여행 중에 배웠던 새로운 삶의 방식이 떠올랐다. 제주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절박해졌다. 마침 구좌읍 송당리에 저렴한 연세 매물이 있었다. 경도로 떠나는 전날 새벽, 나는 캄캄한 새벽에 그 집을 홀로 찾아갔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가서 빈 집 주변을 서성였다. 창문 틈 사이로 집 상태를 그려봤고, 아이가 다닐 지도 모를 초등학교까지 둘러봤다. 편의시설과 안전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제주에 머무를 수 있는 아담한 집 한 칸만 있기를 바랐던 순간이었다.


 제주를 두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서러움과 서글픔이 가득 밀려왔다. 비행기마저 야속하게 보였다. 마흔 살 어른이 이토록 유치해질 수 있는 건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나는 제주라는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떠나야 하는 비운의 여인이 되었다. 더 이상 제주는 대한민국 최남단의 섬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뛰어가 그 품에 안기고 싶고, 생각하면 보고파 가슴이 먹먹해지는 연인이 되어 있었다. 그 날부터 나는 제주를 앓았다. 회복에 대한 간절한 열망 만큼이나 지독하게.  


구엄포구에서 누린 황홀한 식탁
생기 가득한 가을 제주
고독과 서러움이 울컥대는 세화해수욕장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용눈이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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