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담하는 쏘쏘엄마 Nov 26. 2021

아가의 젖내음이 내게 주는 의미 (+실존주의 상담)

실존주의 상담_의미요법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임에도, 유독 마음이 매운 날이 있다. 매운맛을 계속 맛보면 혀가 얼얼해지며 감각이 없어지는 것처럼, 마음도 얼얼해지다가 점점 감각을 잃어간다. 그러다가 정말 허무해진다. 육아를 하며 한 번씩 찾아오는 허무함은 그날 내가 힘들다 못해 이제는 몹시 지쳤다는 신호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밤새 두 아이를 챙기느라 아침이 되었는데도 밤을 새운 것처럼 피곤하고,

열심히 준비해 먹인 이유식을 너는 신경질 내며 계속 뱉어내고,

오전 내내 너와 실랑이하다가 어느덧 1시가 넘은 시간에 배가 고파 밥솥을 여는데 밥이 없고,

괜히 출근한 남편을 탓하며 급한 대로 라면을 끓이고,

자꾸 칭얼대는 너를 달래고 재우느라 라면은 이미 팅팅 불었고,

겨우 재운 네가 깨지 않도록 숨죽여 팅팅 분 라면을 흡입하듯 먹으면서,

하루 종일 바삐 움직였는데도 발 디딜 데 없이 더러운 거실을 보며 한숨이 나오는 그런 날


난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내 하루가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허무하고 힘이 빠지고 울적해진다.


정말 무의미하다..


햇살이 가득 집을 비춰주는데도 어딘가 어두컴컴한 분위기 속, 세수도 못한 채 다 늘어진 옷을 입고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는데 문득 실존주의 상담이 생각났다.







실존주의 상담은 상담이라기보다는 철학 쪽에 좀 더 가까운 느낌이 드는 이론이다.

실존주의 상담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직면한 사람은 죽음, 불안, 고독, 소외 등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을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 바라본다. 의미 요법(Logotherapy)이라고 불리는 실존주의 상담 기법에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어떤 순간에도 그 속에서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은 회복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아내와 부모님, 형제를 모두 잃고 여동생과 자신만 살아남은 순간에도 살아남을 이유를 찾은 빅터 프랭클(로고테라피 창시자)처럼 말이다. 의미는 우리 삶의 방향을 이끈다. 그리고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 사람이 지나가고 있는 시기마다 다르다.






지금 이 시기에, 두 아이의 엄마인 나에게.. 이 하루가 내게 건네는 의미는 무엇일까.

기독교인인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늘 내 하루를 통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실까.  

나 스스로도 모르겠는 내 하루의 의미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주고 싶으신 걸까.


생각을 해보려는데 갑작스럽게 네가 우는소리에 내 몸이 또 자동적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내가 안아주자 울음을 딱 그치고 방긋 웃는 너를 본다.

웃으며 기분 좋을 때 하는 옹알이인 "나다다아, 오오오옴마"를 외쳐댄다.


자다 깨자마자 울면서 엄마를 찾는 널 보면서,  

울음도 스스로 멈추지 못하고 엄마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널 보면서,

잠이 와도, 배가 고파도, 짜증이 나도, 불안해도 엄마만 나타나면 좋다고 웃는 널 보면서  

그저 피식 웃음이 나온다. 왜 울고 싶은데 웃음이 나오는 거지..

나도 모르게 웃으며 불룩 튀어나온 통통한 네 배에 코를 대고 냄새를 킁킁 맡아본다.


모유 냄새와 아기 세재, 그리고 너의 체취가 뒤섞여

콩닥이는 작고 따뜻한 몸에서 나는 달달한 삶은 우유 냄새. 젖내음이다

마음이 포근하고, 몽글몽글해진다.

매워서 얼얼했던 내 마음 한구석도 달콤하고 시원해지는 것 같다.


기분이 좋아져 얼굴을 부비고 장난치면, 저도 좋은지 까르륵 웃어댄다.

귀여워서 이마를 맞대고 콩콩이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와락 잡고 웃으며 부벼댄다.


마치

엄마 고마워요.

엄마가 있어줘서 내가 이렇게 자라고 있어요.

엄마 행복해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엄마 힘내세요.


하는 거 같다.


그러면 이 모든 수고가 다 괜찮아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희생이 희생 같지 않고,

애씀도 더 이상 힘들지 않고,

허무함이 의미를 찾는다.


그래, 네가 이렇게 엄마를 알아볼 만큼 자라고 있는데

이 쪼끄맣고 연약한 네가 엄마를 이렇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환경이 어떻든 너는 그냥 엄마만 있으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행복해하는데


내 하루의 의미가 너구나


아, 하나님께서 지금 육아가 내 사명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또 까먹었네.

나는 무언가를 하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이 아이를 많이 사랑하고, 안아주고, 품어주면 되는 거구나.


내가 또 지치고 허무해지고 마음이 둔해질 때마다, 이렇게 우리 아가 젖내음을 킁킁 맡아봐야지

그렇게 오늘 하루도 틈만 나면 네 머리를, 접힌 목 사이를, 배를, 궁둥이를, 발과 손을 킁킁거리면서 이야기해 주었다.


"오늘도 잘 크고 있어 줘서 고마워, 너로 인해 행복해, 정말 많이 사랑해 아가야"




이전 08화 엄마, 난 아기가 되고 싶어 (+개인심리 상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