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헌의 차에 탔다. 상헌의 차는 곧 대화 내용에 있던 주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오래되었지만 규모는 상당히 큰 상가 건물이었다. 하지만 ‘마음변화센터’라는 간판은 보이지 않았고, 인터넷 지도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여기가 맞나? 그런 곳은 없는데.”
“어? 저거 봐봐. 네가 준 그 명함 뒤에 있던 그림 아냐?”
꼭대기 층에 글자로 된 간판은 없었지만, 창문에 그림만 하나 그려져 있었다. ‘마음변화센터’ 명함 뒤에 있던 그림과 똑같았다.
그곳은 건물 꼭대기 층인 15층에 있었다. 1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투명한 유리문으로 된 공간이 보였다. 그 문에는 명함 뒤에 있던 그림과 함께 마음변화센터’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상헌과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일반적인 병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카운터에는 여직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병원과 다른 건, 한쪽에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서 있는 것이었다. 경호원이거나 보호사일 것 같았다.
“고객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자가 물었다.
“그…… 여기 혹시, 구신효라는 사람 있습니까?”
“네?”
상헌의 말에 직원은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잠시만요, 고객님”
그녀는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는데, 아마도 무전 내용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말소리에 집중하는 것 같더니, 잠시 후 상헌과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고객님. 여기 그런 이름을 가진 분은 안 계십니다.”
“그러면 혹시, 여기에 제가 왔던 기록이 있나 봐주시겠어요? 제 이름은 신성우입니다.”
내 말에 직원은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로 무언가를 두드렸다. 그러는 동안 그녀가 낀 이어폰 속에서 누군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성우 님? 상담 기록도 없으세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내 기록은요? 전 유상헌이에요.”
상헌이 조금 흥분한 듯 소리쳤다. 잠시 후 옆에 서 있던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들이 다가왔다.
“고객님, 나가주셔야겠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기에도 나와 유상헌이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쫓기듯 ‘마음변화센터’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유상헌은 건물 입구가 잘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나는 상헌의 차에 탄 채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을 보며 특이한 사람은 없는지 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의 정적을 깨며 유상헌이 말했다.
“근데 이게 무슨 소용이야? 우리는 구신효라는 사람 사진으로 한 번 본 것뿐인데, 그 사람이 여기 지나간다 한들 알아볼 수나 있을까?”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렇다고 다시 집에 돌아가봤자 원점이고.”
“그냥 한 번 다시 쳐들어가 볼까? 센터 깊숙이까지. 뭐 원장실이든 뭐든 있을 거 아냐.”
“너 그 경호원 못 봤어? 네 뱃살을 봐라. 힘은 둘째치고 스피드에서 이길 수 있나. 원장실 입구까지도 못 가서 경호원들한테 잡혀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질걸.”
내가 불룩 타온 상헌의 배를 보며 말하자 그가 피식하고 웃었다. 다행히 이 우주에서는 내가 원래 알던 유상헌보다 배가 조금은 덜 나온 것 같았다.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화면의 발신인이 ‘발신번호표시제한’으로 되어 있었다. 영화에서나 봤지 실제로는 처음 보는 화면이었다. 스팸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상황과 뭔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그대로 돌려 상헌에게도 보여 주었다.
“뭐지? 일단 받아 봐.”
상헌의 말대로 우선 전화를 받았다. 스팸이었다면 기계 음성이나 멜로디가 들렸어야겠지만, 몇 초간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다가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성우 님, 안녕하십니까. 유상헌 님도 옆에 계시지요?”
“당신 누구예요?”
상헌이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상헌도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폰을 켰다. 유상헌과 함께 있는 걸 알고 있다니, 상대가 우리를 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는 구신효라고 합니다.”
나와 상헌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 다 바보같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그…… 당신 어디… 있어요?”
평소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논리정연한 말투를 구사하던 유상헌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유상헌 님이신가요? 역시 같이 계시는군요. 잘 됐습니다. 두 번 연락드릴 필요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건가요?”
내가 질문했지만 상대가 답을 하기 전에 상헌이 뒤이어 질문했다.
“마음변화센터. 당신, 그 안에 있는 거 맞죠?”
“모든 걸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저녁 8시에 마음변화센터로 들어오십시오.”
“무슨 수작이야? 그냥 지금 말해! 우리가 거기로 가면 되죠?”
상헌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상대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은 채 차분한 어조를 유지했다.
“8시에 오시면 원래의 가족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저에겐 아무 수작도 없습니다. 그저 여러분께 가족을 다시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연락을 드린 것이고요.”
미연이와 다은이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주겠다? 믿을 수는 없지만 기대가 되었다. 아마 유상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뭐라고 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상대가 짧게 한 마디를 더 내뱉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럼 8시에 뵙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지자 자연스럽게 핸드폰 화면에 시계가 보였다. 4시 32분. 8시까지는 3시간이 넘게 남았다. 현재로서는 8시에 구신효를 만나보는 것이 최선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애매했다. 집에 다시 갔다가 오기에는 짧고, 차에서 기다리기에는 긴 시간이었다.
“대체 우리가 왜 기다려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설렁탕 국물이 젖은 밥을 입에 넣으며 상헌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 밥을 잘 먹고 있는 거 아니냐.”
처음에는 유상헌이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하지만 남자 둘이 카페에 세 시간이나 앉아 있는 것도 이상하고, 이런 상황에 여유롭게 커피나 마시고 있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찾아온 곳이 설렁탕집이었다. 하지만 나는 역시 밥이나 먹고 있을 기분은 아니었다.
“우리가 힘든 일 겪고 있는 건 맞는데, 8시에 죽으러 가는 건 아니잖아? 평소 같으면 저녁 다 먹었을 시간인데 배고프지 않겠어?”
“됐다. 배고픈 너나 많이 먹어. 내 것도 좀 먹을래?”
조금 전만 해도 나보다 훨씬 더 흥분한 모습을 보였는데, 천재는 괴짜라는 말이 무색하게 유상헌은 금방 이성을 찾은 모양이었다.
“‘아내의 유혹’ 봤지? 장서희가 복수를 위해 인생 몇 년을 받쳤는데, 그동안 밥도 안 먹었겠냐? 사람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밥은 먹어야 하는 거야.”
“그건 또 언제 적 거냐? 예시를 들려면 ‘더 글로리’ 같은 세련된 걸 들 수 없어?”
상헌과 나는 멋쩍게 웃었다. 유상헌도 사실은 속으로 많이 긴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구신효와 약속한 8시가 되었다. 금세 어둑어둑한 하늘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유상헌과 나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에 올라갔다. ‘마음변화센터’는 영업을 종료했는지 메인 등은 끈 채였고, 어둠을 이길 수 있는 최소한의 전등만 켜둔 상태였다. 입구에 들어가자 카운터에 앉은 직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조금 전에 본 경호원 같은 두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낮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우리에게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박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박사님이라는 사람이 구신효라는 것인가. 나와 상헌은 그들의 안내를 받아 센터 깊숙이로 들어갔다. 가장 안쪽에 팻말도 붙어 있지 않은 방이 있었다. 남자가 노크하더니 잠시 후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마음변화센터’의 구조는 병원과 같이 생겼고, 그렇다면 이곳은 진료실과 같은 공간이 있을 위치였다. 하지만 이 방의 생김새는 병원의 진료실과는 전혀 달랐다. 우선은 병원 진료실보다 훨씬 더 컸다. ‘마음변화센터’의 절반 이상은 이 방이 차지하고 있을 것 같았다. 방 안에서는 한쪽 벽을 향해 영사기가 흰빛을 계속해서 뿜어내고 있었다. 영사기가 비추는 내용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함인지 조명도 다소 어두웠다. 방 중앙에는 치과 진료실에서나 쓸 것 같은 베드가 두 개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뭔지 모를 기계장치가 놓여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책상이 있었는데 모니터가 얼핏 보아도 6대는 있는 것 같았다. 책상과 의자가 하나인 것을 보아 한 명이 여러 대의 모니터를 보며 연구하는 공간 같았다. 방의 뒤편에는 큰 투명 원통 안에서 영롱한 보랏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분명 사진에서 보았던 양자 플라즈마였다.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턱이 긴 얼굴에 짧은 머리, 미간이 주름지고 눈썹 양쪽 끝이 올라가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마치 학창 시절에 가장 무서웠던 수학 선생님을 떠오르게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의사처럼 흰색 가운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 제법 잘 어울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신효라고 합니다.”
드디어 만났다. 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물어보아야 할까. 하지만 구신효는 우리가 질문을 하든 말든 말해 줄 준비가 되었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궁금한 게 많으실 겁니다. 여기 앉으시면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구신효는 치과 베드같이 생긴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 앉으라고요?”
유상헌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이 공간과 분위기를 볼 때 그 의자에 앉으면 마치 우리가 어떤 실험 대상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가족을 만나러 온 것이지 실험용 쥐가 되러 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의자에 앉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서 있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침묵으로 독촉하는 구신효를 보다가 결국 나와 유상헌은 의자에 앉았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겪은 모든 일을 말씀드리고 나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안이니 반드시 따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전에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저의 제안을 수락하든, 거절하든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방에 있는 CCTV가 여러분을 촬영하고 있고, 지금 대화도 녹음되고 있습니다. 동의하신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신효의 말에 방을 둘러보니 천장 곳곳에 여러 대의 CCTV에서 빨간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구신효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어쩌면 멱살을 잡을 수도 있고, 주먹이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차분하게 말하는 그에게 말려든 것인지, 어느새 나도 유상헌도 순순히 그를 따르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알겠다고 대답했다.
“저를 찾으신 것을 보면 이미 어느 정도 정답에 다다르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우주에는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정답이 존재하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유일한 것 같지만, 사실 무수히 많은 다른 우주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살아오신 인생이 반드시 정답은 아닐 수 있습니다.”
구신효는 모호한 말로 시작하더니, 이어 정문숙 박사님이 말한 것과 같이 다중우주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유상헌은 잘 아는 내용일 텐데도 말없이 집중하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구신효는 다중우주는 이론일 뿐 다른 우주와 접촉할 방법이 없으므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미 아실 것입니다.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몸소 겪고 계실 테니까요. 신성우 님, 그리고 유상헌 님. 여러분은 저의 소중한 고객이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저를 찾아오셨고 다중우주를 이동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다중우주에 살고 있는 무수히 많은 자신의 인생 중, 지금의 인생이 아닌 다른 인생을 살고 싶으셨던 거겠죠. 저는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찾아드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