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신효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미연이에게 돌아갈 것만 생각했다. 내가 미연이에게 돌아간다면 지금 내가 있는 이 우주는 신경 쓸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다중우주 이동을 선택한다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우주 속에 살던 내가 이곳으로 와서 나의 인생을 이어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 또한 나 자신이다. 내가 구신효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우주를 이동하기 직전까지 내 인생을 충실히 살아야겠고 생각했다.
학교에 도착해 내 연구실에 가는 길에 나는 복도에 잠시 멈춰 섰다. 복도 게시판에 걸린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제64회 철학 세미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철학과에서는 주기적으로 철학 세미나를 주최하고 있었다. 나는 몇 달 전에도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포스터를 보니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세미나에서 다룬 내용이 지금의 내 상황과 비슷한 부분도 있었다.
그날 세미나의 주제는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면?’이었다. 학부생이 중심이 되어 발제와 토론을 하면서 교수가 중간중간 조금씩 지도해 주는 형태였다. 발제를 맡은 3학년 학생이 먼저 운을 띄웠다.
“첫 번째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이번 세미나의 주제와 같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시뮬레이션으로 가정할게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똑같은 수백 수천 개의 시뮬레이션이 존재할 수 있겠죠. 그럼, 그곳에 있는 수백 수천 명의 나 자신이 모두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철학의 대표적인 분야인 존재론을 주제에 접목한 질문이었다. 토론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오긴 했지만, 결국 의견은 한쪽으로 모이는 듯했다.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더라도, 지금의 나 자신처럼 생각할 수 있는 고도화된 개체가 되었다면 존재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사유한다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 데카르트 철학은 매우 유명한 내용이기도 하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발제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재미있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천 개의 시뮬레이션 속에 있는 천 명의 나는 모두 존재한다…… 여러분 대다수가 동의하는 명제인 것 같아요. 자 그렇다면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유일한 진짜 세상이라고 해볼게요. 다른 수백 개의 시뮬레이션은 모두 이곳과 똑같이 만든 가상의 시뮬레이션인 것이죠. 아마 누군가가 거액의 비용을 들여 시뮬레이션을 만들었겠죠? 그리고 그 목적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라면요? 시뮬레이션 속에서 생체 실험을 하고, 전염병이나 전쟁을 일부러 일으켜 거기서 나온 결과를 우리 세상에 활용하기 위해서라면, 그 시뮬레이션에 저지르는 그 행위는 나쁜 행동일까요?”
꽤 재미있는 질문이었다. 여기서부터는 학생들의 입장도 갈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가짜 시뮬레이션을 만들었고, 그 결과가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면 정당한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학생도 많았다. 하지만 그 반대의 의견을 가진 학생도 많았다. 특히 나윤이 반대하는 입장에서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우리 모두 동의한 거 아닌가요? 시뮬레이션 속 사람들도 우리랑 똑같이 존재한다고요. 이렇게 가정한 이상, 우리의 행복을 위해 그들을 희생시킬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내 행복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침해해도 된다는 거랑 똑같은데, 그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나윤은 아직 2학년이었는데, 고학년 학생들도 조리 있게 말하는 그녀에게 쉽게 반박하기 어려워하는 듯했다.
이어 발제자는 계속해서 재미있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암에 걸리는 대신 시뮬레이션 속 다른 내가 암에 걸리는 게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겠느냐? 라거나, 한 시뮬레이션 속 나에게서 100만 원을 빼앗아 다른 수백 개 시뮬레이션에 속 나에게 100만 원을 복사해서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었다. 질문이 다양해질수록 학생들의 의견도 다양해졌다. 학생들은 다수의 시뮬레이션에 이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거나, 시뮬레이션이 아닌 진짜 세상이 있다면 그곳의 이익을 우선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윤의 태도가 꽤 인상 깊었다. 나윤은 각각의 시뮬레이션을 모두 현실과 대등하게 보아야 한다는 일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어떤 경우에도 소수의 시뮬레이션 속 존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행동은 정당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연구실 책상에 앉아 한참 동안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다수의 다중우주가 존재하는 이 상황은 다수의 시뮬레이션이 존재한다는 것과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시뮬레이션으로 만든 세상이 존재한다면 시뮬레이션이 아닌 진짜 세상도 존재한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다중우주 속에서는 무엇이 진짜 우주인지 규정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나는 학생들의 토론을 들으며 나윤의 의견에 상당 부분 동조했다. 그런데 그 입장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내가 우주를 이동해서 또 다른 나의 행복을 침해하는 행위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아닌가? 나는 이미 빼앗긴 인생을 되찾는 것뿐이니 괜찮은 것일까? 엄밀히는 제3의 우주에 있는 다른 나의 인생을 빼앗는 것이니, 원래 인생을 되찾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가 복잡해질 무렵 오늘 한 번도 유상헌과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당장이라도 다중우주를 이동할 것처럼 보였던 상헌이 신경 쓰였다. 나는 상헌의 연구실로 가 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아마 수업 중이거나 자리를 잠시 비운 게 아니라 아직 출근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상헌에게 전화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상헌은 항상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조금 특별한 상황이었지만, 지금까지 출근하지 않은 건 이상했다.
유상헌은 몇 시간 뒤에 나타났다. 내 연구실 문을 벌컥 열더니 다급하게 달려 들어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혼돈에 빠진 얼굴을 보니 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신성우…… 어떻게 된 거야? 민주 어디 있는지 알아?”
어제까지 나와 함께 했던 유상헌은 이미 여기에 없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유상헌이지만, 내가 알던 유상헌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유상헌이 민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상헌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하루도 안 되어 민주를 향해 떠나 버렸다. 어쩌면 상헌이 이동한 그 우주에서는 상헌도 민주도 행복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새 유상헌을 보니 안쓰러웠다.
“후…… 일단 앉아봐.”
나는 한숨을 크게 쉬고 유상헌을 소파에 앉혔다. 그러고는 며칠간의 이야기를 간단히 해주었다. 상헌은 처음에는 믿지 않는 것 같다가도 내가 말을 이을수록 점차 믿는 눈치였다.
“그러면 나도 다시 민주한테 갈 수 있다는 거야?”
한동안 말없이 내 말을 듣던 유상헌의 첫마디에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뭐라고?”
“그 구신효라는 사람 연락처 가지고 있어? 나도 다중우주 이동하게 해 달라고 하면 이동시켜 줄까?”
“너 내 말 못 들었어? 구신효가 이동시켜 준다고 해도 네가 어제까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아냐. 비슷한 우주로 가는 거지. 이걸 네가 민주 곁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상헌은 고민할 틈도 없이 곧바로 말했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원래 세상으로는 못 간다는 거 아냐? 여기나 다른 우주나 나한텐 다 낯선 곳일 뿐이야. 그렇다면 민주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게 당연한 거잖아.”
분명 내 앞에 있는 사람도 유상헌이었다. 다중우주를 이동한 것은 기억뿐이니 외모는 분명 그대로였다. 하지만 대화해보니 어제까지의 유상헌과는 느낌이 미묘하게 달랐다. 얼굴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과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어제의 상헌도 오늘의 상헌도, 7년 전 다중우주가 생겨나기 전까지는 같은 인생을 살았다.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서로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겠지만, 둘 다 민주와 결혼했다는 사실도 같았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다르게 만들었을까 싶었다.
“이곳에 있던 유상헌이 이동해서 지금 네가 강제로 여기로 오게 된 거잖아. 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거기 있는 너는? 그 유상헌도 영문도 모른 채 여기로 와야 해. 그래도 돼? 너 자신이잖아.”
“그거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다 내 인생이라면, 이왕이면 내가 그중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면 좋은 거잖아?”
상헌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7년 전 만들어진 6만 개의 우주만큼 6만 명의 내가 존재한다. 6만 명의 나는 각각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신성우들이 어떻게 살고 있던 간에, 나는 지금 여기에서의 인생밖에 누리지 못한다. 지금의 내 육체가 느끼는 행복밖에 느끼지 못한다. 나에게 6만 개의 인생 중 어떤 인생을 살겠냐고 묻는다면, 나도 미연이와 다은이와 함께인 인생을 택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우주에서 유상헌은 벌써 두 번을 이동했다. 이 유상헌도 오자마자 다중우주 이동을 얘기하는 걸 보면, 모든 유상헌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상헌이 원할 때마다 구신효가 그를 이동시켜 주기만 한다면, 상헌은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만큼 수없이 이동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유상헌에게 며칠만 신중하게 고민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는 어제까지 쓴 글을 상헌에게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천천히 꼭 읽어달라고 당부했다. 여기에는 내가 이 일을 겪으며 느낀 사유도 담겨 있고, 이전 유상헌의 행동도 담겨 있다. 내 글을 읽으며 유상헌의 생각이 바뀌길 바랐다.
내 연구실로 돌아와 슬슬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민주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오빠 오늘 안 잊었지? 주원이 데리고 8시까지 마리아홀로 오면 돼」
오늘 저녁에는 민주가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연주한다고 했다. 민주는 과거에 한 오케스트라의 첼로 객원으로 몇 년간 활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주원이를 낳고 육아에 전념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민주는 오늘 아침에 갑자기 이전에 활동하던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연락을 받았다. 첼로 연주자가 갑자기 상을 당해 오늘 무대에 대신 서 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민주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오늘 연주할 곡은 이전에 여러 번 무대에서 연주해 본 적 있는 곡이기에 조금만 연습하면 연주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민주는 오늘 하루 열심히 연습하고 단원들과 맞춰보아야 한다며 일찍부터 나갈 준비를 했다.
원래 연주자가 가족에게 주려던 티켓까지 양도해 준 덕에 나와 주원이도 오케스트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주원이를 데리고 연주회장으로 향했다.
“와, 엄마가 저 무대에 서는 거야?”
주원이는 난생처음 보는 큰 무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대에 엄마가 선다는 사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나도 이렇게 큰 무대에 선 민주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민주는 내가 알던 성격과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민주가 나와 연애하던 시절에도 오늘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잠시 활동을 쉬고 있을 때 민주는 오늘처럼 하루만 다른 연주자를 대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 민주는 그런 부탁을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겼다. 남을 대신해 하루만 연주해 달라는 게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고작 하루 연습해서는 진정한 연주를 할 수도 없다며 화를 냈다. 민주는 언젠가 첼로 독주회를 하는 게 꿈이라고 늘 내게 말했다. 민주는 항상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7년이 넘은 일이니, 성격이 바뀌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민주는 오늘 아침에도 나에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내가 알던 원래의 민주보다 훨씬 더 털털한 모습이었다.
잠시 후 무대에 객원들이 하나둘 나오더니 민주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우아해 보였다. 민주의 첼로 연주를 곁들인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소리가 연주회장을 가득 채웠다.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악보를 보며 열중하는 민주의 모습이 꽤 멋져 보이기도 했다.
연주가 끝나고 무대 뒤로 들어가는 길에 민주가 객석을 바라보았다. 나와 주원이를 찾는 듯 보였다. 내가 민주에게 손을 살짝 흔들었다. 민주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와 주원이에게 미소를 살짝 지었다.
“아빠, 우리 엄마 진짜 멋있다. 그치?”
“맞아. 정말 멋있는 여자야.”
나와 연애하던 시절에도 나와 맞지 않았을 뿐, 민주는 언제나 멋있다는 말이 어울리는 여자였다. 어쩌면 이 멋진 여자와 함께 사는 것도 괜찮은 인생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마음 깊은 곳 한쪽에 물꼬를 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