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
손과 팔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내 한쪽 팔이 옆에 누워 있는 여자를 감싸고 있는 게 보였다. 물론 그 여자는 민주였다. 아마도 잠결에 내가 그녀를 안은 것 같다. 이제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이 민주라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 팔에서 느껴지는 민주의 체온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여기에서의 인생에 익숙해져 버리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얼굴을 적셨다.
내 가족은 분명 미연이와 다은이다.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그것이고, 당연히 나는 그들에게 돌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되뇌며 나는 출근 준비를 해서 집을 나왔다. 차의 창문을 열고 가을바람을 느끼며 출발했다. 하지만 내가 가는 곳은 학교가 아니었다. 오늘은 오전 강의가 없어서 여유가 있었다. 나는 우주를 이동할지 결정하기 전에 미연이의 얼굴을 한 번은 꼭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종로의 길거리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출근하는 사람부터 학원가까지 사람들이 북적였다. 나는 미연이가 일하는 학원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 안에서도 꽤 유명한 강사인지 입구에부터 미연이의 사진과 함께 강의를 홍보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사진이 조금은 보정된 모습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 미연이의 얼굴인데 내가 아는 미연이가 아니었다. 정장을 입고 있는 사진 속 옷차림도 익숙한 모습은 아니었다.
나는 강의 시간표를 보면서 미연이가 있을 강의실을 찾아갔다. 계단을 올라갈 때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들렸다. 작게 들려서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분명 미연이의 목소리였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강의실 앞으로 가 보았다. 강의실 벽에는 창문이 없었고, 출입문에 세로로 긴 작은 창문 하나만 나 있었다. 고개를 숙여 창문에 시선을 맞춰 가며 쳐다보니, 그 창문 너머로 핀마이크를 낀 미연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미연이의 얼굴을 일주일 만에 볼 수 있었다.
미연이의 목소리는 들리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강의 중에 가벼운 농담을 했는지 학생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고, 미연이도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유리 너머로 멀리서 볼 뿐이었지만, 미연이가 행복해 보인다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학원 1층 로비로 내려왔다. 미연이의 얼굴을 보긴 했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강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걸어볼까 고민했지만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나는 로비에 놓인 책상에 잠시 앉았다. 양옆에 앉은 학생이 책을 펴고 공부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잠깐 짬을 내서 공부할 만큼 다들 열심히 하는구나. 로비 천장에는 커다란 텔레비전이 달려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학원 홍보와 더불어 강의 홍보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조금 뒤 영상에는 미연이가 등장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책상에서 일어나 화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 영상은 미연이를 인터뷰하는 형태로 강의를 홍보하는 영상이었다.
“저도 어릴 적에는 영어를 싫어했거든요. 부모님이 시켜서 억지로 영어 학습지를 했었는데, 일주일 내내 공부를 안 하고 밀리다가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몰아서 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중학생 때 미국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면서 영어에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드라마 속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때부터 저는 영어에 관심을 가지다가 점점 영어를 사랑하게 됐죠.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재미있게 영어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어요.”
미연이가 종종 나에게 했던 얘기였다. 대학에서 교직이수까지 마쳤지만, 학교에서는 재미있게 영어를 가르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차라리 학원 강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영어 공부가 재미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다은이를 가지면서 그 꿈은 사라졌다. 이런 대형 학원의 강사 일을 육아와 병행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미연이는 그 꿈을 가슴속에 묻은 채 한 고등학교의 평범한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 한 번은 특별활동으로 ‘미드 청취반’을 만들었다고 기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여준다는 것에 학교 측 반응도 미지근했고, 입시를 앞둔 학생들의 관심도 적어서 결국 일 년 만에 없어졌다.
미연이는 퇴근하고 오면 반 아이들이 말썽을 부렸다며 종종 나에게 하소연하곤 했다. 학교에서 하는 일에서는 좀처럼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결혼하고 육아를 위해 꿈을 포기한 것에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영상 속 미연이는 달랐다. 한마디 한마디에서 넘치는 자신감과 열정이 느껴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 기뻐 보였고, 그렇기에 더 빛나는 모습이었다.
“……성우?”
뒤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곧바로 그 목소리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뒤를 돌자 미연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성우 맞네? 여긴 어쩐 일이야?”
“……으…응. 우연히 지나가다가…… 미연이… 네 얼굴 사진이 붙어 있길래 잠깐 들어와 봤어.”
놀라서 힘들게 얼버무렸다. 하지만 미연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농담을 건넸다.
“아, 그렇구나. 난 영어 공부하러 온 줄 알았네. 내 강의가 인기가 좀 많긴 해.”
미연이를 보지 못한 건 일주일밖에 안 되었지만, 여긴 내가 원래 있던 곳과는 다른 우주였다. 내 앞에 있는 미연이는 7년 전 그날부터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외모에서도 분명 차이가 느껴졌다. 미연이는 수수한 보라색 원피스에 은색 목걸이를 두르고 있었다. 나와 살 때 즐겨 입던 옷차림에서 많이 벗어나진 않았지만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알던 미연이보다 더 날씬했고, 더 우아했고, 더 빛이 났다. 그녀의 인생에 내가 없는 게 그녀를 더 빛나게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떻게 지내, 미연아? 네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쁘다.”
“맞아. 어떨 때는 강의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나는 물어보고 싶은 질문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직접적으로 물었다.
“결혼은…… 했어?”
미연이가 훗 소리를 내며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안 했어.”
마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곧이어 미연이가 고개를 돌려 출입문 밖을 보았다.
“성우야, 나 퇴근길이라. 그럼, 먼저 가 볼게.”
“벌써? 아…… 아니, 그래. 가야지. 그럼 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연이가 손을 흔들며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미연이는 뒤돌아 출입문으로 걸어 나갔다. 문밖에는 검은색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운전석에서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내리더니 미연이를 보고 해맑게 웃는 게 보였다. 나보다 10cm는 더 클 것 같은 그 남자는 미연이를 가볍게 안더니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결혼은 안 했다더니, 나보다 훨씬 멋진 남자와 연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누군가와 연애만 할지 나중에 결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누군가의 엄마가 되기보다는 커리어우먼이 되는 길을 택한 것 같았다.
분명 나는 미연이와 함께하는 동안 행복했다. 미연이도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본 미연이는 나와 함께하던 이미연보다 훨씬 더 멋지고 빛나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그녀가 나를 만남으로 인해 그 멋진 모습을 조금은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오빠, 난 이제 자러 갈게. 오빠는?”
밤이 되어, 소파에 앉아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민주가 말했다.
“응, 먼저 들어갈래? 난 서재에 조금 있다가 들어갈게.”
미연이를 보고 나서 학교에 가서 수업도 하고, 집에 오자마자 민주와 주원이와 시간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재에 가서 오늘 일을 기록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요즘 오빠 서재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것 같아. 일이 바빠?”
민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미안해. 요즘 할 일이 좀 있어서.”
“괜찮아. 일이 바쁜데 할 수 없지.”
민주가 소파에서 일어나 안방 쪽으로 걸어갔다.
민주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민주와 살고 있지만, 민주는 나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미연이를 만나고 왔다. 민주의 입장에서는, 남편이 일주일 내내 다른 여자에게로 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민주가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는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멈춰 섰다. 몇 초 동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가만히 서 있더니 뒤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내게 물었다.
“그래서, 결정했어?”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우주를 이동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가 그걸 알고 이런 질문을 던질 수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반문했다.
“뭐? 뭐를?”
“사실 나 다 봤어. 미안해.”
“뭐를 봤다는 거야?”
나는 놀라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요즘 오빠가 밤마다 서재에서 뭔가를 하는 것 같아서 이상했거든. 오늘은 오빠 오전 수업 없는 날인 거 아는데 아침 일찍 나갔잖아. 노트북까지 놓고 나갔길래…….”
매일 출근길마다 가지고 다니던 노트북인데, 오늘은 미연이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분주하게 나가다가 깜빡하고 노트북을 두고 나갔다. 내가 그동안의 일을 기록한 것을 민주가 다 보았다는 말인가.
민주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아래로 눈을 내리깐 채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읽어봤어. 미안해. 하지만…… 나는 오빠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해.”
“민주야.”
“그래도 난 오빠를 믿을 수밖에 없어. 오빠를 이해해. 다 괜찮아.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 천천히 와.”
민주가 갑자기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민주를 붙잡아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민주의 말에 놀란 심장이 가라앉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먼저 침실로 들어간 것은 나에게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려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민주가 내 글을 다 읽었다고? 그렇다면 내가 원래 미연이의 남편이었고 그녀에게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다 알았다는 뜻이다. 아니, 애초에 내 이야기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미연이가 민주로 바뀌어 있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내 글을 읽었다고 해도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민주는 ‘믿을 수밖에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나는 서재로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모니터를 열자 바로 화면이 들어왔다. 나는 노트북을 사용하고 난 후에 항상 전원을 종료하는 습관이 있다. 아마도 민주가 내 글을 읽고 나서 전원을 종료하지 않은 채 모니터를 덮은 것 같았다.
화면보호기를 풀자 내가 쓰던 글이 곧바로 나타났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도 좀 이상했다. 분명 내가 쓴 게 아닌 문장이 보였다. 스크롤을 올려 보니 내가 어제까지 쓴 글 뒤에 다른 글이 덧붙여져 있었다.
「오빠에게」
민주가 내 글을 모두 읽은 후에, 이어서 그곳에 나에게 쓰는 편지를 남겨둔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민주의 편지를 읽어 나갔다. 그 편지의 내용을 보고 놀랄 것에 비하면, 민주가 내 글을 다 읽었다는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