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민주는 언제 만날 수 있는 건데요?”
조용히 구신효의 말을 듣다가 속이 탔는지 유상헌이 물었다. 구신효는 날을 세워 손을 뻗더니 일관된 어조로 내뱉었다.
“거기 여러분의 옆에 있는 장비를 머리에 쓰시면 됩니다.”
나는 구신효가 가리키는 장비를 보았다. 검은색 고철에 여기저기 전선이 휘감긴 모양이었는데, 머리에 쓰는 헬멧이라기에는 너무도 크고 복잡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차라리 '쏘우'에 등장하는 장비라면 어울릴 것 같았다.
“가족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고 해놓고 그건 무슨 개소리야?”
유상헌이 조금 흥분한 듯 소리치며 물었다.
“정확히는 가족을 볼 수 있게 해 드린다고 말씀드렸죠. 한 분씩 그 장비를 머리에 쓰시면 가족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어느 분부터 하시겠습니까?”
“이게 뭔 줄 알고 쓰라는 건지 설명은 해줘야 할 거 아니에요?”
유상헌의 말이 맞긴 했다. 정문숙 교수님의 실험일지에도 앤드류라는 사람이 이상한 헬멧을 쓴 사진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쓰고 다중우주를 이동했다고 했다. 게다가 이건 사진 속 그 장비보다 훨씬 더 크고 무섭게 생겼다. 이걸 썼다간 정말 '쏘우'에서처럼 내 머리가 터지기라도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밤중에 비밀스러운 공간. 밖에는 덩치 큰 사내 두 명이 우리를 지키고 서 있다. 구신효가 우리를 해칠 목적이라면 지금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은가? 무력으로 이 장비를 우리에게 씌우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정문숙 교수님에게 들은 구신효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는 나쁜 짓을 할지언정 쓸데없는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걸 쓰면 원래 가족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내 질문에 구신효가 살짝 미소 지으며 능글맞은 말투로 했다.
“저는 제안을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가버리시면 저는 제안을 할 수가 없죠. 제안을 드리기 위해 쓰시라는 겁니다. 가족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요.”
나는 장비를 집어 들었다. 들자마자 생각보다 무서워서 살짝 놀랐다. 너 진짜 쓸 거냐고 상헌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머리에 장치를 썼다. 구신효는 잘 생각하셨다는 말과 함께 6대의 모니터가 놓인 책상으로 걸어가 앉았다. 키보드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당당하게 머리에 장치를 썼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겁에 질린 상태였다. 잠시 후 뒤편에 있는 양자 플라즈마의 보랏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정전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천장의 전등 불빛들이 동시에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그때 갑자기 어지러운 느낌이 들며 주위가 핑 돌았다. 귀에서 ‘삐-’하는 소리가 들렸다. 최근에 이명처럼 들렸던 그 소리였다. 그리고 지금은 술을 마시고 쓰러지며 다중우주를 이동했던 그때처럼 크게 들렸다.
빔프로젝터가 비추는 흰 화면이 16개의 분할 화면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각각의 화면에 조금씩 어떤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곧 그 화면 속에 보이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고화질 텔레비전처럼 선명하진 않았지만 분명 알아볼 수 있었다. 16개 중 몇 개 화면에서 미연이와 다은이가 보였다.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하는 모습도 보였고, 다른 화면에는 텔레비전 앞에서 함께 과일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어떤 화면에서는 민주가 보이기도 했고, 어떤 화면에서는 누군지 모를 처음 보는 아이도 보였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일인칭의 시점 같았다.
“이게…… 뭐죠?”
나도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었지만, 아무 말 못 하고 있는 나를 대신해 상헌이 물었다.
“지금 이 순간에 여러 우주 속에서 살고 계신 신성우 님의 모습입니다. 정확히는 그 신성우 님의 눈으로 보고 계신 광경이죠. 제가 8시에 오라고 말씀드린 게 이 때문입니다. 오후 8시가 하루 중 가족들과 함께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간이죠.”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죠? 저게 진짜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요?”
“다른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렇습니다. 다른 우주의 계신 신성우 님의 눈으로 바라본 시각 정보는 대뇌 후두엽의 시각 피질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는 뇌파를 뒤에 놓인 양자 플라즈마와 신성우 님이 쓰고 계신 장비를 통해 받아 와서 시각화한 것입니다.”
“혹시…… 저 화면을 확대할 수 있습니까? 맨 위에, 오른쪽에서 두 번째 화면이요.”
구신효가 버튼 하나를 누르자 그 화면이 커지며 한쪽 벽을 꽉 채웠다. 식탁에 앉아 있는 미연이와 다은이의 모습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일상이었지만 지금은 화면 너머로만 볼 수 있는 모습…….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옆에서 상헌이 나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다. 조작된 영상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나요? 제 말은… 저 화면 속 신성우도… 제가 그의 눈을 통해 지켜보고 있는 걸 아나요?”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고객님들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을 토대로 보면, 잠시 이명이 들리거나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반대로 이 우주에 살았던 저도 제 인생을 이렇게 훔쳐보았겠네요?”
“유감입니다만…… 그렇습니다.”
약 한 달 전부터 ‘삐-’ 하는 이명과 함께 순간적인 어지러움이 몰려온 적이 종종 있었다. 아마도 그건 이 우주 속 신성우가 나를 지켜보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는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 인생을 빼앗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자, 여러분이 가족과 함께하고 있는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이제 유상헌 님께서도 보시겠습니까?”
나는 미연이와 다은이의 모습을 계속 보고 싶었다. 하지만 구신효가 키보드로 무언가를 입력하자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화면이 다시 흰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장비를 옆에 벗어 둘 수밖에 없었다.
상헌은 장비를 손에 쥔 채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전까지는 구신효에게 흥분하기도 했던 유상헌이지만, 민주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인지 곧 장비를 머리에 썼다.
이번에는 16개의 화면에 상헌의 여러 인생이 보였다. 혼자 있는 듯한 화면도 많았고, 민주와 함께 있거나 처음 보는 여자와 함께 있는 화면도 있었다. 상헌은 원래도 아이는 없었다고 했는데 민주와 함께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것 같은 화면도 보였다. 어느새 상헌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상헌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쳐다보더니 잠시 후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보였다.
“저…… 다시 만날 수 있나요? 민주를……”
상헌의 목소리에는 적대감은 전혀 없고 간절함만이 묻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구신효는 의자에서 일어나 화면을 등지고 우리 앞에 섰다.
“다중우주 속에서 여러분은 수많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각 우주에서의 삶은 여러분이 원래 살고 계셨던 우주와 차이가 아주 적은 것도 있고, 많은 부분이 다른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분명 다시 만나고 싶어 하시는 그 가족을 화면 너머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는 우주가 하나가 아닌 것도 보셨겠죠.”
“제가 본 것 중 제가 원래 살던 우주도 있었나요?”
내 질문에 구신효는 우스운 질문이라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없습니다. 여러분이, 엄밀히는 이 우주에 살았던 여러분들이 비용을 지불하고 이용하신 서비스의 조건이죠. 그들의 우주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줄 수도 없다는 의미입니까?”
유상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을 조금만 바꿔 보십시오. 원래 있던 곳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왜 꼭 그곳으로 가야 합니까? 신성우 님. 유상헌 님. 모두 화면을 통해 원래의 가족을 보셨습니다. 화면 속에서 본 여러분의 아내가, 또는 자녀가 원래 가족과 달랐습니까?”
정문숙 교수님은 7년 전 정전이 있던 날 6만 개의 다중우주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저 양자 플라즈마가 사진 속 그것과 같다면, 내가 본 우주들은 그 6만 개 우주 중 하나일 것이었다. 그 6만 개의 우주가 만들어진 시점에는 마치 똑같은 우주가 복사되듯 내 인생도 모두 똑같이 복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각각의 우주에서 나는 다른 선택을 하며 조금씩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내가 7년 전에 미연이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는 완전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다은이가 태어나던 그 순간까지, 아니 다은이가 생긴 그 순간까지만이라도 같은 인생을 살았다면 다은이와 똑같은 존재가 그 우주에도 있을 것이다.
“다중우주 중 여러분이 원래 살던 인생과 거의 비슷한 곳도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원래의 가족과 함께 살고 계신 우주는 수백, 아니 수천 개는 되겠죠. 물론 조금은 다를 수 있겠죠. 여러분이 거실에 놓인 소파가 다르다거나, 화장실 슬리퍼가 다르다거나요. 그게 중요한가요? 여러분은 원래의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시고, 그들만 그대로이면 되지 않습니까? 제가 드리는 제안은, 여러분을 그곳으로 보내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구신효의 제안은 우리를 원래 있던 우주로 보내주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다중우주 중 원래와 거의 비슷한 곳. 즉, 적어도 다은이가 생길 때까지는 같은 인생을 살았던 우주 중 한 곳으로 보내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내가 그 우주로 간다면 미연이와 다은이에게 돌아갔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짚고 넘어갈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만약 제가 그 우주로 이동한다면, 거기에 있는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구신효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곧이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살고 계신 오늘을 살 것입니다.”
구신효의 제안을 받아들여 내가 다른 우주로 간다면, 그곳에 있는 내가 여기로 오게 되는 것이다. 내가 며칠째 겪고 있는 이 혼돈, 어쩌면 고통이라 말할 수도 있는 이 일을 그가 겪어야 한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유상헌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바로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민주에게…….”
“물론입니다. 결정만 하셨다면 언제든 보내드리겠습니다.”
구신효는 곧바로 대답했지만 “상헌아”하고 내가 바로 유상헌을 불렀다.
“너무 성급히 결정하지 마. 나랑 얘기해 보고 며칠만, 아니 하루만 더 생각해 보면 안 돼?”
경솔하게 결정하는 것 같아 상헌을 말리려 했다. 그리고 상헌이 다중우주를 이동한다면 며칠 동안 이 일을 함께 헤쳐 나간 동료도 사라지는 것이었다. 다시 혼자가 되는 게 두렵기도 했다.
“저의 제안은 언제든 유효합니다.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제 조건을 지키신다면요. 고민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구신효는 나와 유상헌에게 명함을 건넸다. 책상 서랍에 있던 것과 같은 명함이었는데 기재된 전화번호가 달랐다. 아마 보안을 위해 주기적으로 번호를 변경하는 듯 보였다.
상헌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민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민주야?”
내가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자 상헌이 곧바로 말했다.
“받아. 괜찮아.”
수신 버튼을 누르자 민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지는 않았지만 차 안이 조용해서 민주의 목소리는 상헌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오빠, 어디야? 오늘도 늦는 거야?”
“응. 미안해. 오늘 마무리할 일이 좀 있어서.”
“괜찮아, 오빠. 내가 언제나 사랑하는 거 알지?”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나는 흘긋 상헌의 눈치를 보았다. 분명 들었을 텐데 일부러 정면을 응시한 채 운전에 집중하는 척하는 것 같았다.
“으…으응. 그럼, 얼른 들어갈게. 집에 가는 길이니까 금방 갈 거야.”
전화를 끊자 정적이 흘렀다. 나는 상헌에게 방금 민주와의 대화를 언급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말했다.
“부러워할 것 없어, 상헌아. 내 아내는 미연이니까. 너처럼 가족을 잃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알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너…… 그런데 정말 이동할 거야? 아까 왜 그렇게 성급하게 이동하고 싶다고 한 거야?”
“당연한 거 아냐? 지금 여기서 나는 잃을 게 없어.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까 그 자리에서 바로 보내준다고 해도 갔을 거야.”
조금 뒤 상헌의 차는 내 집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상헌을 보내기 전에 나는 그에게 말했다.
“상헌아, 너도 들었지만 네가 구신효의 말대로 이동하는 건 원래의 민주한테 돌아가는 게 아냐. 다른 곳으로 가는 거지. 그걸 돌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오늘은 일단 집에 가서 푹 쉬고 천천히 다시 얘기해 보자.”
집에 들어오자 주방 불만 빼고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시계는 1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민주는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아마 나를 위해 주방 불만 켜 두고 먼저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나는 한참 민주를 바라보다가 주원이의 방에 가서 주원이의 얼굴도 바라보았다. 주원이의 침대 옆에는 ‘아빠’라는 말과 함께 얼굴 그림이 붙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그림이었다. 아마도 늦게 들어오는 나를 기다리며 그린 그림 같았다. 그림을 보자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상헌은 여기에서는 잃을 게 없다고 말했다. 나도 잃을 게 없는 것일까? 내 가족은 분명 미연이와 다은이다. 하지만 내가 민주와 주원이는 쉽게 버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