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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어택 Oct 15. 2024

(20화) 9월 18일 (1)

9월 18일



 구신효 박사에 대해 더 이상의 정보를 찾을 수 없었기에, 우선은 여기에서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평소와 똑같이 출근해 강의도 하고 유상헌을 만나 점심을 먹었다. 상헌도 학계에 아는 지인을 동원해 구신효의 행방을 찾고 있지만, 아직 진전은 없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연구실로 가는 길에 조교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교수님!”

 “네? 무슨 일이에요?”


 교수가 A4용지 몇 장이 묶인 서류를 건넸다. 


 “학부생 중 다음 학기 교환학생 지원자 명단이에요. 이번에 좀 많네요. 교수님께서 추천하실 학생은 다음 주까지 결정해주시면 돼요.”


 나는 서류를 받아 연구실에 들어왔다. 학기마다 하는 일이었다. 학부생 중 외국으로 교환학생을 희망하는 학생이 지원서를 내면, 학부 정교수들이 한 명씩 학생을 추천한다. 추천받은 학생 중 성적이 가장 높은 학생이 교환학생으로 선정되는 구조였다. 주로 철학이 발달한 영국으로 가고 있었기에 교환학생 제도가 나름 철학과의 장점으로 불리고 있었고, 해가 갈수록 지원자는 점점 더 많아져 갔다. 


 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이며 지원자 명단을 보는데,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이곳에 살던 나와 불륜 관계인 성나윤이었다. 나는 지원자들의 지원서를 훑어보았다. 대부분 학생은 2페이지 이내로 쓰게 되어 있는 지원서의 분량을 꽉꽉 채워 썼다. 폰트 크기는 지정하지 않았기에 작은 폰트로 최대한 많은 내용을 담으려고 노력한 지원서도 있었다. 그만큼 지원서마다 교환학생을 가고 싶은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그런데 나윤의 지원서는 한 페이지도 제대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 내용도 영국에서 철학을 더 공부해보고 싶다는 형식적인 내용뿐, 간절함이나 정성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지원서를 낸 것인가 생각하는데 연구실 문이 열렸다.


 마침 나윤 학생이었다.


 “교수님, 여기 있었어요?”


 다른 학생이라면 나를 찾아올 때 조심스럽게 들어오고, 내가 소파에 앉으라고 하기 전까지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소파를 지나 내 책상까지 오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내가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치울 새도 없이 순식간에 내 책상으로 다가왔다. 나윤은 책상 위의 지원서들을 쳐다보더니 눈동자가 커지며 말했다. 

 

 “엇, 교환학생 지원자 추천하는 기간인가 봐요. 제 것도 거기 있죠?”

 “이건 교수가 알아서 할 일이야.”

 “엥? 왜 말을 그렇게 하신대? 전 교수님만 믿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 말에 나윤이 그렇게 짧은 지원서를 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알아서 그녀를 추천해 줄 것으로 생각하거나, 이미 그렇게 하기로 얘기가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분량을 반도 안 채운 지원서를 보고 나더러 추천하라고?”

 “에이, 분량이 무슨 소용이에요. 진심이 담겨 있으면 되지. 교수님은 알잖아요? 내가 얼마나 영국에 가고 싶어 했는지.”

 “영국에 가고 싶은 거야,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 거야?” 

 “둘 다요.”


 나윤은 능글맞게 대답하여 멋대로 소파에 앉았다. 주로 학생과 상담할 때 내가 앉는 상석 자리의 소파였다. 


 “다른 교수들도 지원서를 받았을 텐데, 내가 너를 추천하는 건 내 자신에게 먹칠하는 거야.”


 나윤은 자신이 잘못했다거나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갑작스럽게 바뀐 내 태도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왜 그래요? 그럼, 지원서 내일까지 다시 써서 낼게요. 됐죠?”

 “A+ 학점, 그리고 교환학생까지. 이런 게 교제의 대가였던 거야?”


 나윤이 나를 등지고 앉은 소파에서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아니 대가라뇨! 그리고 교제 같은 그런 단어도 안 쓰면 안 돼요? 우리…… 좋았잖아요.”


 좋다는 게 뭐가 좋았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내가 말없이 책상만 바라보고 있자 나윤이 말을 이었다. 


 “교수님, 그러지 말고 오늘 저녁이나 먹어요. 지난주에도 피곤하다고만 하더니…….”

 “다음에. 오늘은 바빠.”


 나윤이 갑자기 나한테 다가오더니 내 팔 한쪽을 당겨 팔짱 끼듯 그녀의 몸에 붙였다. 내 팔뚝은 그녀의 가슴을 스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나를 유혹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요즘 갑자기 왜 그래요?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말을 해요. 아니면 언니가 의심이라도 하는 거예요?”


 아마도 언니라는 말은 민주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당연하겠지만 나윤은 내가 유부남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도 이런 행동을 하고 있었다. 


 “요즘은 좀 정신이 없어. 다음에.”

 “하, 진짜.”


 나윤은 크게 한숨을 쉬더니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 방을 나갔다. 나와 나윤의 관계는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것 같았다. 나는 나윤이 높은 학점이나 교환학생 추천과 같은 대가를 바라고 유부남과 교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나윤의 행동은 그것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내가 식사를 거절한 것을 연인에게 거절당한 것처럼 섭섭해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던 것인가. 나는 책상 아래 비밀 서랍을 열어 보았다. 나윤과 연락을 주고받던 핸드폰을 열어 그녀와 어떤 관계였는지 좀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핸드폰 하나만 들어있다고 생각했던 서랍 깊숙이에 다른 무언가가 보였다. 나는 손을 집어넣어 그것을 꺼냈다. 


 그것은 흰색의 명함이었다. 앞장에는 ‘마음변화센터’라는 상호와 전화번호 하나만 적혀 있었다. 뒷면을 보니 ‘마음변화센터’의 로고로 보이는 그림 하나만 그려져 있었는데, 세 개의 동그라미가 각각 직선으로 이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책상 위에 올려 둔 내 핸드폰으로 명함에 적힌 번호를 눌러보았다. 통화한 이력은 전혀 없었다. 그때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책상 서랍에 든 세컨폰을 꺼냈다. 그 핸드폰에 같은 번호를 눌러보았다. 놀랍게도 ‘마음변화센터’라는 곳에 여러 번 통화한 이력이 있었다. 가장 마지막 통화 이력은 9월 13일, 내가 미연이의 남편이자 다은이의 아빠였던 마지막 날이었다. 


 이 ‘마음변화센터’라는 곳이 구신효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지만 며칠 전 미연이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처럼 없는 번호라는 안내 음성만 들렸다. 


 나는 곧바로 그 명함을 들고 유상헌을 찾아갔다. 상헌에게 명함을 보여주며 구신효에 대한 단서를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상헌도 핸드폰에 그 번호를 입력해 보더니 큰 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나도 있어!”


 상헌이 핸드폰 화면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번호와 여러 번 통화한 이력이 있었다.


 “마음변화센터? 근데 분명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상헌이 책상으로 가더니 노트북을 가지고 왔다. 노트북을 펴고 무언가를 골똘히 쳐다보더니 잠시 후 상헌의 눈이 커졌다.


 “찾았다! 이거였어.”


 상헌은 노트북을 돌려 나에게 보여주었다. 상헌이 받은 이메일이었다.


 <마음변화센터입니다.>

 오늘 고객님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저녁 8시에 고객님이 계신 건물을 나오면 검은색 차량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차량에 탑승하십시오.

                                                 - 마음변화센터     


 그 외에 다른 이메일이나 상헌이 보낸 답장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이 마음변화센터라는 곳이 분명 우리랑 관련이 있는 거잖아. 같이 찾아보자.”


 유상헌과 나는 각자 노트북을 펴고 ‘마음변화센터’를 검색해보았다. 그런데 별다른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 구신효의 이름과 함께 검색해도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찾아보다가 상헌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말했다.


 “성우야, 내가 인터넷 카페에 마음변화센터를 검색해봤거든. 카페 이름이나 게시글에는 나오는 게 없고, 여기 댓글 중에 딱 하나 보여.”


 상헌이 노트북 화면을 내게 보여주었다.  


 저는 마음변화센터에서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 거기가 어디인가요?

   └ 검색해도 안 나오는데... 연락처나 주소 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카페 이름이 ‘우울증을 이겨내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이곳의 내가 실제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카페 이름이 자꾸만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우울증을 이겨내고 싶은 사람들? 왜 이렇게 익숙한 것 같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내가 가입한 인터넷 카페 목록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목록에 ‘우울증을 이겨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약간의 환호가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맞아! 내가 여기 회원으로 되어 있어. 며칠 전에 로그인했다가 우연히 봤어.”

 “뭐? 너 왜 이런 데 가입한 거야?”

 “아니. 난 가입한 기억이 없어. 다중우주를 이동하기 전의 내가 가입한 거겠지.”


 유상헌은 생각에 빠진 듯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혹시 네가 쓴 글 있어? 쓴 글 목록 한 번 봐봐.”

 “잠시만. 아니 없어. 어, 잠깐. 댓글은 있는데?”


 게시글은 과거에 자신이 인생의 갈림길에 섰었고, 그 당시 했던 선택이 후회되어 매일 밤 그 생각으로 잠을 설친다는 내용이었다. 그 글에 달린 댓글에 내가 대댓글을 남긴 것이었다.  

   

 사르트르 : 검색해도 안 나오는데... 연락처나 주소 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내 기억에도 없는데 분명히 내가 썼다는 글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유상헌이 무언가 발견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어? 잠깐 이거…….”


 대댓글의 상위 댓글을 보니, ‘마음변화센터’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조금 전에 유상헌이 찾은 그 댓글에 내가 대댓글을 남긴 모양이었다. 상헌이 내게 물었다.


 “그 카페에 혹시 대화나 쪽지 같은 기능이 있어?”


 나는 카페 대화 기록을 열어 보았다. ‘마음변화센터’라는 닉네임의 누군가와 대화를 한 기록이 있었다. 

  

 마음변화센터 님의 말 : 후회되는 과거가 있으신가요?

 사르트르 님의 말 : 네

 마음변화센터 님의 말 : 그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있으신가요?

 사르트르 님의 말 : 있다면요?

 마음변화센터 님의 말 : 이 주소로 오시면 상담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서울시 구로구 대문동 671-2     


 상헌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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