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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Nov 19. 2017

제주를 걷다_온평에서 표선까지

올레 3코스  2015년 3월 14일 봄을 쫒아 걷는 마음

3월 중순이 돼가면서 봄의 느낌이 점차 강하게 다가온다. 주말에는 무조건 걸어야한다. 지난주에도 날씨 때문에 꼼짝 못했다. 무리해서라도 갈 수는 있지만 스산한 2월의 날씨와 꽃샘추위가 계속되는 데다가 설 연휴까지 끼어있어서 2월은 주말 걷기에 나갈 여유가 없다.


3월 중순이 되며 간간히 따뜻한 날씨가 얼굴을 내비친다.

주말에는 어딜로 갈지 결정해야겠다. 어디를 갈까. 아직 가보지 못한 올레길 3코스를 골랐다. 겨울 내내 기지개를 표지 못한 채 걷기도 게을리한 책임을 물어 하루를 혹사해보기로 했다. 거리를 따져보니 22km가 된다.

제주시 연동의 숙소에서 터미널을 지나 온평포구까지 가는 동부 순환버스의 701번 버스를 탈 시간을 계산해 보니 얼추 2시간 30분이나 걸린다. 제길 동부 순환버스만 정확히 한 시간 40분이 소요된다. 멀다.

겨울 내내 기지개를 표지 못한 채 걷기도 게을리한 책임을 물어 하루를 혹사해보기로 했다

온평포구에 도착해 예의 익숙한 동남해안의 바닷길을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저 멀리 일출봉이 꽤나 멀찍이 보인다.

조그만 포구의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듯 다양한 돌들이 쌓여 여러 가지 탑 아닌 탑을 만들어 놓았다. 그 노력이 가상해 보인다.


마을에 들어서니 어느 마을에나 자주 보이는 나무가 보인다. 팽나무다. 이 마을에는 3그루의 팽나무가 나란히 서있다. 순간 제주에 와서 내가 찍고 싶은 풍경이나 대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팽나무를 찍어보리라.


바다를 조금 지나던 올레길은 방향을 틀더니 민가를 지나 안쪽으로 길을 잡는다. 이미 포장이 되어있는 민가를 지나자 언뜻언뜻 감귤농장도 보이지만 거의 모든 밭들이 무를 재배하고 있다.

여기저기 무 경작을 마친 밭이 상품화되지 못한 무의 잔재로 흩어져 있다. 무청의 색깔도 새파란 모습에서 조금씩 시들어 가는 누런빛에 가까워지는 것을 많이 보져준다. 너무나 많은 무가 상품화되지 못한지라 자그마한 무들은 아예 뽑지도 않는 채 경작을 마친 상태다. 묘한 안타까움이 앞선다.


저 무들의 맛이 어떨지 궁금했다. 지나가다 작은 무 하나를 뽑았다. 제주에서는 경작을 마친 밭에 가서는 필요한 것은 가져가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오며 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에 자그마한 무 하나를 뽑았다. 흰색 부분을 돌에 부딪혀 잘라 버리고 무청을 잘라내니 먹을 만큼만 남았다. 이빨로 껍질을 벗겨내고 먹기 시작한다. 예상보다 한결 달다. 무 특유의 매운맛은 없고 너무 달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가량 된 시점이라 배도 채울 겸 갈증도 해소할 겸 참으로 맛난 먹거리다.

너무나 많은 무가 상품화되지 못한지라 자그마한 무들은 아예 뽑지도 않는 채 경작을 마친 상태다. 묘한 안타까움이 앞선다

곳곳에서 할머니들이 줄을 지어 무를 뽑고 있다. 아마도 차례로 돌아가며 밭에서 무을 뽑으리라. 한참을 지나니 인력을 공급하는 버스가 보인다. 저 할머니들은 어디에선가 데려오고 일당 주고 데려다주는 인력파견 일을 하는 담당자인 셈이다.


3코스는 그 무밭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인상이 강하지 않다. 무밭과 이미 열매는 없는 감귤농장이 번갈아 가면서 계속되는 길을 걷는다. 왜 이 길을 올레길로 돌면서 만들었을까.


중간에 통오름과 독자봉이라는 오름 두 곳을 연이어서 거친다. 오름이래야 그다지 높지도 않은 데다 경치도 아주 특이한 것은 없다. 그래서인지 쉴만한 벤치 하나 변변이 없는 게 조금은 아쉽다.

통오름은 설명에 의하면 모양이 물통처럼 움푹 파인 오름이란다. 가을이면 온통 보랏빛 꽃밭으로 변한다. 패랭이, 개쑥부쟁이, 꽃향 유등이 자생한다는 설명이다.


몸이 지치고 지친지라 걷다 보니 일차 목표지인 김영갑 갤러리에 도착했다. 보고 갈까 하는데 시간이 없다. 집에서 나온 시간이 오전 10시 30분 온평포구에서 걷기 시작한 게 1시 10분이다. 안내상으로는 3코스를 다 걷는데 6-7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이를 아는 관계로 무척이나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김영갑 갤러리에 도착하지 이미 4시가 됐다. 고민 끝에 다음에 차를 몰고 와서 가볍게 보고 가자는 생각으로 오늘은 패스. 머릿속에 위미항의 빛 그리미 갤러리에 가서 차를 한잔 마시고 갈까 하다가 가는데도 1시간 이상 걸릴 테니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가던 길을 재촉했다. 중간에 샛길로 빠지는 올레길 들이 계속 큰길로 안내한다. 예산대로 구제역으로 인해 길을 돌려놓았다.


다음은 독자봉이다. 


통오름과 길 하나 사이를 두고 남쪽으로 이웃해 있는 오름으로 화구는 남동향으로 벌어진 말굽형의 ㄷ자형으로 길게 뻗어져 있다. 산정부에는 봉수터 흔적이 돌담으로 둘러져 남아있는데, 이곳 봉수는 조선시대 북동쪽으로 수산 봉수와 서쪽의 남산 봉수와 교신했다고 한다....(중략)... 홀로 떨어져 있어 외롭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독자봉이 있는 마을에 독자가 많은 것도 이 오름의 영향이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

바다로 나서기 전 머리를 깎은 듯한 무들이 쪼르륵 줄을 서있는 느낌이 너무 귀엽고 신기해서 한참을 쳐다봤다. 하나같이 수확을 거부당한 느낌이다. 자세히 보니 무마다 검은 반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병든 무인 듯싶다. 그래도 그림만은 버섯돌이들이 줄을 지어 서있는 듯한 느낌이다.


다시 바다로 길을 잡았다. 지금도 지난해 처음 걷기 시작한 올레길 표선에서 남원까지의 해안이 검은색 현무암이 널브러진 것 외에는 기억이 없었던 것처럼 이곳도 큰 차이가 없다. 해비치까지 가야 제대로 된 해변이 나올 테니 그냥 잔잔한 바다를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오후 3시가 넘어가자 그 맑던 하늘은 침침한 하늘로 바뀌어 버렸다. 곧 비라도 올 모양으로 편치 않은 하늘이다.

중간에 샛길로 빠지는 올레길 들이 계속 큰길로 안내한다. 예산대로 구제역으로 인해 길을 돌려놓았다

머지않아 뙤약볕의 남도가 되겠지만 그래도 이처럼 우중충한 날씨는 특히 걸을 때는 별로다. 내 처지가 별로인 상황에서 하늘까지 그 모양이면 마음은 우울함이 먼저 온다.


갑자기 넓은 초원에 멀리 야자나무들이 담처럼 둘러싸여 있다. 어디지 싶다가 아차, 여기가 신천 바다목장이겠구나 싶다. 역시나 개방한 신천목장이다. 드넓은 초원이 리조트를 짓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그래도 앞바다는 섭지코지나 중문에 비할바는 못된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커다란 개 3마리를 줄로 끌면서 내 앞으로 온다. 그중 한 마리를 풀어놓았는데 나를 향해 달려온다. 순간 겁이 난다. 녀석이 나한테 반가워서 저러겠지만 커다란 리트리버가 달려오면 사실 겁먹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녀석이 나를  살짝 스치더니 주인을 명령을 듣고는 내게 와락 달려들지는 않는다. 휴... 다행이다.


이 넓은 목장에 바닷가를 보니 귤껍질이 널브러져 있어 보기 안 좋다. 그래도 가장 큰 역할은 귤껍질 말리는 일인가 보다.


멀리 보이는 표선을 향해 마지막 길을 걸었다. 발바닥이 너무 아프다. 아마 물집이 잡히지 않았을까. 좋지 않은 운동화도 내 안 좋은 걷기습간과 겹쳐져서는 오른쪽 바닥이 너무 아프다. 물집이 잡히는 느낌이다.

머지않아 뙤약볕의 남도가 되겠지만 그래도 이처럼 우중충한 날씨는 특히 걸을 때는 별로다. 내 처지가 별로인 상황에서 하늘까지 그 모양이면 마음은 우울함이 먼저 온다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 해비치의 해변이 눈에 들어왔다. 리조트가 있어야 어울리는 장소이다. 그 사이에 물이 빠져나가 모래밭이 그냥 노출되어 있다. 길도 없이 그냥 건널 수 있는 모래사장. 멋진 장소다. 
 

약 5개월 전에 두려움과 기대로 걷기 시작한 표선의 4코스 시작점이 눈에 들어온다. 벌써 시간이 이리도 지났는가. 난 무엇이 변해있지?


민속박물관에 도착하니 6시다. 그래도 그 먼 거리를 5시간 만에 도착했다. 해가 벌써 뉘엿뉘엿 지려하고 있다. 버스에 타기가 무섭게 졸음을 재촉하며 머리를 창가에 기댔다. 눈을 뜨니 이미 밖은 깜깜하고 터미널이 코앞이다. 뻐근한 하루의 일과를 넘어 내일은 어디든 갈 수나 있을까? 아마 늦게 일어나면 집에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다리와 허리의 곳곳이 이상반응이다. 무리한 하루의 후유증이야 감당할 몫이다.


즐거운 걷기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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