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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Nov 28. 2017

바다와 중산간의 이분법

올레 16코스 2015년 7월 4일

한편으로는 당분간 올레길을 걷는 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걷고 싶고 보고 싶은 제주의 길들을 생각하며 숙소를 나섰다.


외박 아닌 외박을 하고 느지막이 점심까지 해결하고 짐 정리를 위해 숙소에 오니 1시가 넘었다. 어찌할까 그냥 머물까 하다 오늘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리 멀지 않은 16코스는 시작점이 고내리부터다. 이전의 올레길 걷기도 벌써 한참 전이라는 생각에  바다의 느낌이 아스라하다. 혹시 잊고 있어나?  아마도 바다에 다 달으면 생각이 나겠다 싶어 702번 순환버스 정류소까지 무작정 걸었다. 민속오일장 정류소가 10분은 걸리는 듯싶다. 도중에 마트에 들러 꽁꽁 얼린 삼다수 2개를 사고는 기분 좋게 버스에 올랐다.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걷고 싶고 보고 싶은 제주의 길들을 생각하며 숙소를 나섰다

금방일 줄 알았던 목적지가 한참을 간다. 결국 애월 전이 고내리라는 사실을 다시 알게 됐고 첫 출발점인 우주물 앞에 섰다. 갑자기 뒤편에 보이는 올레길 표시가 보여 따라가다가 지난번에 15코스의 마지막 이정표라는 사실을 알아버리고는 다시 제자리로 왔다. 여기서부터는 구엄까지 해안길이고 그곳에서 중산간으로 올라가는 길인 것을 알고 있다. 16코스는 해안과 중산간의 2분법이 명확한 곳이다.


이미 여러 차례 차를 타고 지나거나 잠시나마 걷던 길인지라 해안의 풍경들은 익숙하지만 차를 타고 보던 풍경과는 역시 다른 게 걷는 맛이다.

해안도로변을 한 발짝식 걸으면서 수많은 관광객들의 차량과 마주치지만 어째 내가 그들과는 조금은 다른 처지가 아닐까 하는 차별의식을 느끼며 걷는다. 때로는 자전거를 탄 일행도 만나고 다정한 연인이 셀카를 찍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수없이 많은 차량의 행렬에서 어쩌면 나는 이곳에서나 서울에서나 정처 없는 이방인 신세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근데 갑자기 내가 원하던 기분이 이거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뒤따르자 뒤통수를 맞은 느낌으로 자신을 냉정하게 볼 수 있게 됐다.


바다는 이미 뻔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  신선함을 준다는 점에서 새롭고 설레지만 그런 기분을 오래 만끽할 수 없기에 다시 우울감을 전해주기도 한다. 그렇게 감정조차도 제멋대로 섞이게 하는 것이 바다의 힘이겠거니 하며 걷는다.

근데 갑자기 내가 원하던 기분이 이거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뒤따르자 뒤통수를 맞은 느낌으로 자신을 냉정하게 볼 수 있게 됐다

신엄까지의 애월 해안도로는 언제나 봐도 아스라함이 느껴지는 그리움과 먹먹함을 함께 준다. 나에게 이 길은 이상하게도 밝고 화려한 느낌보다는 뭔가 담지 못한 이야기를 저 멀리 던져놓고 바구니만 쳐다보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슬픔이 있나 보다.


곳곳을 걸으면서 느낄 수 있는 멋진 풍경과 숨겨진 장소에서 매달려 하루를 매진하는 낚시꾼들을 발견하고는 아직도 이 자리에 서려면 얼마나 있어야 할까? 자그마한 사념을 맘에 한번 더 담는다.

오늘 하루는 사실 한 가지 주제를 생각하기 위해 걷는데 도대체 집중이 되지 않는다. 정리하려는 생각은 나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의 느낌과 분위기만이 하염없이 지나쳐간다.


서울의 가족들은 잘 견디고 있는 걸까. 내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힘든 상황인지 알면서도 이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나는 어떤 존재일까. 그 와중에도 재미와 머뭇거림을 느끼게 해주는 제주는 또 다른 나의 무엇을 위해 이토록 자꾸 이끄는 것일까.


올라 가고프면서도 올라가고 싶지 않은 이중성을 해결하고픈 딜레마에 하루 종일 시달리며 걷는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는 자연을 맘 속에 품다가 부러움과 질시도 잔뜩 같이 끌어안고는 그리움으로 끝나는 순간순간의 감정들을 주체할 수가 없다.

배가 고프다. 이전처럼 아침을 먹고는 저녁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결심하고 무작정 걸었는데 생각보다 먼 길이다. 한참을 걸었음에도 아직도 13km가 남았다거나 4km가 남았다는 이정표로 거의 도착을 했겠거니 했는데 다음 이정표는 3km에 불과하다. 이 아이러니는 역시 기준이 내 맘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 거리가 바뀌었을 리가 없는데 어느 구간은 이토록 길게 느껴지고 어느 구간은 금방 휘리릭 가버렸으니 그 기준이 내 맘에 있지 않고서야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단 한 가지 아무리 걸어도 혹은 생각하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의구심은 여전히 남아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것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말이다.

어느 구간은 이토록 길게 느껴지고 어느 구간은 금방 휘리릭 가버렸으니 그 기준이 내 맘에 있지 않고서야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우울한 날씨만큼이나 하루를 정리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다. 걷다가 신발을 쳐다보니 밑바닥은 다 갈라지고 찢어지고 더 이상 걷기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그냥 낡았겠거니 했는데 이 정도 일 줄이야. 도착하는 즉시 마트에 가서 신발을 사서는 신던 신발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저 신발을 버림으로써 제주 생활의 머뭇거림이 끝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힘껏 던져버렸다. 속이 후련하다.


구엄리 돌소금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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