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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Jan 31. 2018

한라산 겨울산행 2_백록담 보러 가는 길

자연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산행길이 이렇게 쾌적해도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다. 모든 조건이 너무 좋은 편이다. 눈은 그대로 쌓여있고 날씨는 영상이다. 바람도 없고 하늘은 맑고 푸르르다.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일 수밖에 없는 환상의 겨울산을 두고 천천히 길을 간다.


시간이 지나도록 배고픈지도 모르겠다. 앞사람을 따라 오른다. 간간히 뒤돌아 보면 눈 쌓인 나무와 오름 그리고 구름 등 다양한 풍경이 보인다. 앞으로 가다가 뒤돌아보기 쉽지 않다. 그래도 둘 다 놓치고 싶지 않다.

능선을 서서히 오른다. 순간 일행이 발걸음을 멈춰 한참을 머무른다. 멀리 보이는 백록담이 아득하다. 사람들 줄이 그대로 서있다. 정상까지 사람들의 움직임이 매우 둔하다. 이를 어쩌랴. 고지가 바로 저기인 듯한데 속도는 굼벵이 수준이다. 선택은 하나다. 대세에 따를 뿐이다.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일 수밖에 없는 환상의 겨울산을 두고 천천히 길을 간다

재촉할 필요가 없다. 가다가 주변의 풍광이 바뀌었음을 알아챘다. 정상이 보이고 능선에 있는 나무들과 파란 하늘이 아주 가깝다. 구름도 가깝지만 볕이 더욱 강해졌다. 이대로라면 백록담 분화구도 볼 수 있을 터이다. 힘을 내고 희망을 가질만하다.


중간에 자주 멈춰서는 줄을 무시하고 옆으로 새서 깊은 눈 속에 몸을 맡겨 보기도 한다. 사진과 함께 이런저런 풍경을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본다. 사실 풍경이 너무 아름다우면 눈물이 나오지 않던가.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몇몇 사람들의 거친 행동도 그다지 흠이 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싶으면 그리 해라...

생각보다 정상을 오르는 길이 늦다. 사람들은 계속 올라가는데 도대체 내려오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정상에 이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있는데 어디에 다 서있을런가. 궁금해졌다.

사실 풍경이 너무 아름다우면 눈물이 나오지 않던가

백록담 정상은 정상을 향해 오를수록 바람이 조금씩 거세고 차가워진다.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하늘도 구름 낀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갑자기 불안해진다. 지금의 날씨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다 올라가서 짙은 구름이 끼면 너무나 실망할 테니 말이다. 속도를 내기도 어려운 상황.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나무도 없고 낮은 관목이나 돌에 눈이 쌓이고 거센 바람에 눈발이 날린다.  에베레스트의 설산에 온 느낌과 동일시해보느라 감정이입에 애쓴다. 


어느 순간 구불구불 정상을 향해 가고 있다. 아래서 보기에 까마득히 정체되어 있었지만 막상 조금씩 속도가 나면서 어느덧 내가 아래서 바라보던 위치에 올라와 있다. 아래쪽의 사람들 줄이 반대로 보인다. 

'저 아랫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얼마나 아득하고 정체되어 있다고 느낄까'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나무도 없고 낮은 관목이나 돌에 눈이 쌓이고 거센 바람에 눈발이 날린다

사람들은 지칠 만도 한데 정상이 코앞이라는 기대 때문인지 도무지 힘들어하는 내색을 하는 이들이 없다. 오늘 하루를 얼마나 기다렸던 것일까. 나야 갑자기 결정한 산행이지만 결정할 때 결코 오늘이 아니면 후회막급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풍경의 의미를 알기에 복잡하고 힘든 과정이지만 선뜻 한라산으로 나선 것이리라. 멀리 비행기를 타고 내려오고 관광버스를 대절하면서 까지.

쉬엄쉬엄 오르는데 줄이 줄지 않는다. 가만히 보니 이미 정상인데 줄이 계속 정체되어 있다. 안 되겠다 싶어 옆으로 비켜서 정상을 오르니 마지막 줄은 정상을 향하는 줄이 아니다. 백록담이라는 돌 표지판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한 줄이다. 소위 인증숏을 남겨 주변에 알리고 싶은 마음들 이리라. 얼마나 많은 인증숏이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올라오려나... 나도 빠지지 않고 올려야지 결심한다.


옆으로 비켜서니 난간에 기대어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바로 여기다. 여기가 백록담이다.

그 보기 어렵다는 백록담의 모습이 아주 선명히 보인다. 그것도 눈 덮인 모습을 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백록담에 올라 그 모습을 못 보고 가면서 아쉬워하는지 잘 알기에 단순한 기쁨 이상의 감격이 느껴진다. 나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난리다. 사진과 환호성이 겹쳐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백록담에 올라 그 모습을 못 보고 가면서 아쉬워하는지 잘 알기에 단순한 기쁨 이상의 감격이 느껴진다

눈 쌓인 백록담은 마치 TV에서 가끔 나오는 달 표면의 분화구와 닮아있다. 혹시 여기가 달인가. 정상의 사람들은 이미 정상이 아니다. 다들 한라산 정상에 섰다는 기쁨과 백록담의 절경과 구름과 도시의 풍경, 눈 덮인 산과 하늘을 함께 본다는 다양한 의미에서 이미 정상이 아니다. 기쁨에 들떠 내는 소리가 한가득이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누르는 표정이 눈앞의 먹잇감을 확실히 포획한 야생동물과 닮아있다. 사람들이 어쩌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런 심정이었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리라.


셀카로 찍는 사진이라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터지만 어쩐지 제대로 된 포즈를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화구 주변을 돌면서 누를 수 있는 한 많은 카메라 버튼을 누르고 있다. 똑같은 사진을 계속 찍고 있는데도 새로움이 계속된다. 난간을 넘어 백록담이 훤히 보이는 곳에 차례로 줄을 서서 포즈를 취해본다. 혼자 올라온 나 홀로 등반객이 나를 보며 애원하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민다. 

"셀카로만 찍기에는 아까운 표정이죠?"

"네..."

사실이 그렇다. 셀카로 찍는 사진이라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터지만 어쩐지 제대로 된 포즈를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렵게 올라온 젊은 여성도 그것을 느꼈는지 나에게 부탁해 온다.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자 기쁜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백록담을 본 것은 두 번째다. 어린 시절 한라산에 무지 어렵게 올라 백록담가에 앉았다가 내려갔던 아득한 기억이 남아있다. 그 이후로 한라산 주변을 맴돌던 경험은 있었지만 한겨울에 백록담을 올라왔던 적은 없다. 그런데 백록담은 참 인상적인 모습을 남겨준다. 커다란 분화구만으로도 낯설지만 흰 눈과 검은 용암의 대비는 더욱 생경한 모습을 보여준다. 분화구 안의 우둘두둘한 자국은 자세히 비추어주던 달 표면의 분화구 모습과 아주 많이 닮았다.


무엇보다 구름을 산 밑에 깔고 있는 모습은 이곳이 천상의 어떤 곳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지역은 멀리 시내의 빌딩과 바다의 모습도 보이고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분화구 안의 우둘투둘한 자국은 자세히 비추어주던 달 표면의 분화구 모습과 아주 많이 닮았다

그럼에도 정상은 정상이다. 바람이 무척이나 매섭다. 함께 간 동료의 애플 핸드폰 배터리가 힘없이 사라지더니 작동을 멈추었다. 내 핸드폰의 배터리와 외장 배터리도 어느 순간이 지나자 더 이상 작동이 안 된다. 안타깝게도 배터리 아웃이다. 내려가는 내내 아쉽게도 사진을 촬영할 수가 없게 됐다.

아쉽다. 


못내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뒤로한 채 하산길을 택하려 하니 왜 이리 아쉬운지. 괜히 이곳저곳 둘러본 곳을 한 번 더 둘러보고는 눈 딱 감고 하산을 택했다. 저 멀리서 여전히 줄을 서서 오르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이어져 있다. 그들은 눈에는 내가 부러울까 아니면 방해자일까.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던 줄이 한참을 내려오니 끊겼다. 더 이상 입산통제로 사람들이 오르지 않는다. 간간히 몇몇 팀들만이 정상을 향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부터는 하산길인데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과 다리가 풀리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다.

자연은 결코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망가지거나 하는 속도도 마찬가지다

내려오는 길 내내 따스한 날씨로 상고대가 녹고 눈이 떨어져 물로 변하는 소리가 들린다.

툭 투둑 툭 툭...

눈 녹는 소리란 이런 것이구나...

공교롭게도 아침의 그 빽빽한 눈밭이 급격하게 녹아내리며 나뭇가지가 강하게 인상을 드러낸다. 물론 일부 지역이지만 말이다. 오전에 오르지 못했으면 그 같은 풍경을 다시 경험하지 못했으리라.

다시 한번 확인한다.

자연은 결코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망가지거나 하는 속도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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